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함께 멀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시차, 여행자들에게는 시차 뒤에 적응이라는 말이 따른다. 시차 적응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여행 초반의 계획이 달라지곤 한다.
어젯밤의 고된 개선문 산책에도 불구하고 멀뚱하게 새벽을 맞았다. 커튼을 젖혀놓고 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여유'이다. 바쁘지 않게 천천히 걷고, 머무르고 싶은 곳에서 쉬어 가며 오래오래 바라보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몸이 시키는 대로라면 이제 슬슬 밀려올 느긋한 잠을 즐길 채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시차에 굴복하고 나면 여행 내내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게 뻔하다. 오늘 낮 동안만 잠과 싸워 이겨내면 몸은 저절로 이곳의 시간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채비를 했다.
잠이 안 오는 지난밤, 바로 옆방의 코 고는 소리를 오롯이 들어야 했던 우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움직였다. 호텔 지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첫 손님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이른 아침 정장을 하고 출근하는 파리지앵들과 함께 몽마르트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파리에서 치안이 좋지 않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의 팔목에 팔찌를 채우고 돈을 요구한다는 팔찌단과 몸에 분뇨를 뿌리고 닦아 주는 척하며 가방을 훔쳐간다는 소매치기들, 선행을 위한 사인을 하게 하고 돈을 요구하는 싸인단들,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충격적인 방법으로 여행자들의 지갑을 노리는 사람들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곳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새벽의 몽마르트르에는 소매치기뿐만 아니라 상인도 여행자도 없는 텅 빈 언덕이었다.
파리에서 제일 높다는 몽마르트르 언덕이 연희동 언덕에 사는 나에게는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언덕길이 이어지고 적막함이 맴도는 길을 힘들이지 않고 걸어 올라갔다.
정지된 몽마르트르, 아직 새벽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곳은 청소부들이 출근하기도 전이라서 지릿한 전날의 오물 냄새를 여과 없이 들이마셔야만 했다. 언덕 위로 손님들을 실어 나르던 케이블카도 정지되어 있고 입구에 있는 회전목마도 새벽잠에 빠져 있다. 고즈넉한 공원 끝에 우뚝 솟은 사크레 퀴르 성당만이 이른 아침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참 고요한 풍경이다. 계단을 따라 올라간 언덕 위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산 하나 없는 평평한 도시이지만 거리에 나무가 많고 공원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서 산이 없어도 아쉬워 보이지 않는다. 높이 솟은 빌딩이 없어서일까 시야의 반이 푸른 하늘이다.
‘만끽’이라는 말은 이런 때 잘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언덕에서 내려 다 보이는 파리의 전경을
오롯이 느끼고 있다. 눈으로 감상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마치 텅 빈 영화관에서 혼자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사람들이 없는 이곳에서 오히려 두려움이 생기고 나는 자꾸만 주변을 살피게 된다.
저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걷는 걸로 봐서 아침 운동을 하러 오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왜 혼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걸까, 덜컥 겁이 났다. 남편에게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일렀다. 이곳에 오기 전 여행자들의 블로그에서 읽었던 글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드문 한적한 장소에서 일어 난 사건 사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은 웃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주머니 속에 있는 그의 손과 발자국 소리에 곤두서 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은 점점 굳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굳어있는 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웃는 듯 마는 듯 무슨 말인가를 했다. 아무려나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할 텐데도 내 목소리는 작았고 떨렸다.
길게만 느껴지는 짧은 순간, 우리 곁을 스쳐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계단 옆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다.
곧이어 후회가 밀려온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자유여행을 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만 너무 골몰했던 것 같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하면서 무슨 여행을 하겠다는 건지, 괜히 선한 사람을 의심한 내 행동이 한심했다.
몽마르트르를 제대로 느끼려면 이른 아침이 아닌 사람들이 들끓는 시간에 왔어야 만 했다. 데아트르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델이 되어 보기도 하고 거리 예술가들의 행위 예술에 손뼉도 쳐 주며 층계가 비좁도록 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즐겨야 했다.
가난한 동네에서 느낄 수 있는 두려움도 어쩌면 몽마르트르 언덕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것을 수용하고 감상하는 것 또한 이곳을 즐기는 진정한 방법이다.
여유 있는 여행이란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워야 한다. 마음속에 중심을 어느 곳에 두느냐 에 따라 마음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나를 해치려는 자가 있으면 나를 도우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함께 어울려 있을 때 가능하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피하고 움츠리고 두려워하지 않을 작정이다.
데아트르 광장에 한 무리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들고 거리의 기념품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비로소 몽마르트르 언덕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