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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들판에서

샹젤리제 거리

by 연희동 김작가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누가 뭐래도 쇼핑이다. 눈으로만 즐기는 쇼핑도 좋지만 좋은 값에 갖고 싶은 물건을 사게 되면 더없이 흐뭇하다. 쇼핑의 메카인 샹젤리제 거리를 가기로 한 날, 오월의 따뜻한 햇살이 쇼핑하기 참 좋은 날이 아니냐며 속삭이고 있다.

여행자에게 신발은 그날의 행로에 대한 정보이며 의미이기도 하다. 운동화를 신을까 하다가 샌들로 바꿔 신었다. 그러다가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신발이라고는 이 두 켤레의 신발이 전부인데 두 개의 신발을 놓고 뭘 신을지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준다는 믿음이 있다. 오늘은 아무래도 좋은 곳을 많이 걷게 될 것 같다.

숙소 앞에 있는 개선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북적이는 거리가 바로 샹젤리제 거리였다. 프랑스 ‘낙원의 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상젤리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인다.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 배낭을 메고 가는 여행자들, 서로 만나 악수를 하며 등을 어루만지는 사람들, 모두 꿀을 담뿍 품고 있는 꽃봉오리 위를 날아다니는 행복한 나비들과도 같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할 때,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서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항상 시간에 쫓겨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나는 언제쯤 그런 여행을 해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꿈이 무척 소박하다는 걸 이곳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물가가 비싼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싼 것이 커피였다. 여행 중에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거나 지친 다리를 쉬고 싶을 때면 서슴없이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단돈 1.5유로로 두 가지를 다 해결할 수 있었으며 그동안 내가 원했던

느긋한 여행자가 되어보는 것도 할 수 있었다.


꽃자주색 어닝이 늘어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노천카페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 참을 앉아 있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 우리의 방식대로라면 손님을 방치하고 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분주한 웨이터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커피를 신청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문화이지만 왠지 오래 앉아있어도 눈치 따위는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메뉴판을 든 종업원이 달려오고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며 식기도 전에 먹으면 바로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하는 문화도 어찌 보면 그만의 개성이 있지만 조금 무심한 듯해도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이곳이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따뜻한 오월의 햇빛이 부서지는 가로수 아래,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바라보아도 좋다. 길 건너 햄버거 가게에 사람들이 줄 지어 서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랜차이즈 음식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맥드날드 햄버거가 다른 나라보다 뒤늦게 입성하였다고 들었다. 아마 햄버거가 싫은 게 아니라 자존감 높은 그들 국민성으로 봐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따라 하는 게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곳에 유난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프랑스에 배달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뒤로 이곳 문화의 중심인 카페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파리의 카페는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서 철학과 문학예술 사상을 토론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던 낭만의 산실이다. 파리에서 카페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문화의 한 축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카페에 앉아 두 세 시간씩 담소를 즐겼던 그들도 바쁜 현대 사회에서 ‘빨리빨리’와 교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걸까, 길 건너 햄버거 가게의 긴 줄을 보면 이제 이들의 문화도 환절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흔히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고 한다. 낭만은 로망의 일본식 발음이고 우리 말로는 감성적이라는 형용사 외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로맨스라는 말이 오히려 친근하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깊숙하게 끼어 물고 있는 여성은 혼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듯한데 혼자 있는 그 모습만으로 왠지 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다. 아주 귀엽고 예쁜 아이를 불란서 인형 같다고 하는 데 실제로 프랑스 여인들은 키가 작고 왜소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연인은 둘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입맞춤을 한다. 두 개의 예쁜 인형을 보는 것 같다. 커피와 와인, 위스키 잔이 담긴 쟁반을 번쩍 들어 올리고 이곳저곳 탁자 사이를 분주하게 다니는 웨이트리스의 바짝 조여 맨 앞치마와 걷어 올린 팔뚝의 근육이 건강해 보인다. 이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한 명, 웨이트리스뿐이었다. 이런 걸 낭만이라고 말해야 될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달콤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담배도 대화도 키스도 없이 묵묵히 앉아서 거리의 풍경만 바라보아도 꽤 괜찮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마시던 커피도 바닥이 나고 내 주변의 손님들도 거의 자리를 떴을 때쯤 이제 나도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침 꽃무늬 쇼핑백을 들고 들어오는 중국인 여행객에게 자리를 비워주고 일어섰다.


사실 화려함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전에 파리를 두 어번 왔을 때, 이곳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쳐가면서 무척이나 화려한 거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산책하 듯 천천히 걸어서 돌아본 샹젤리에 거리는 화려함은 물론 그 뒤에 멋스러움을 갖추고 있었다.

명품 샵의 인테리어는 오히려 소박했다. 상품을 빛내기 위해서 주변 배경의 채도를 낮췄을 수도 있지만 고객을 대하는 점원들의 태도가 멋스러웠다. 그냥 들러 본 손님이든 상품을 구매할 손님이든 관계없이 진정성 있는 태도로 환대하였으며 쇼핑만 하는데도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눈이 즐거우면 발도 가볍다. 꽤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전혀 힘이 들지 않은 건 사실은 마침 세일 중인 아동복 샾에서 B사의 제품을 좋은 값에 구입하였기 때문이다.

물 건너온 프랑스 제품을 서울에서 사려면 이곳에서 사는 세 벌 값의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 여행을 떠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손녀만 생각하는 바보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될 수 있으면 쇼핑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하자던 처음 계획은 무너지고 '낙원의 들판'에서 나는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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