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마음과 설렘이 묘하게 섞여서 자꾸만 마음을 다짐하게 된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무사히 예약해 둔 호텔에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파리는 여행자들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여행자의 주머니를 노리는 자들의 천국이기도 하다는 말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갑을 풀더라도 편안하게 호텔로 갈 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예약해 둔 한인 택시 기사님이 남편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당연한 우리말 인사가 무척 친근하게 들린다. 이곳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는 한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파리에 가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었다. 이 말은 나를 가장 겁먹게 하는 정보였다.
“이곳에 소매치기가 많은가요?”
파리의 치안은 어떤가요?라고 돌려 말할 걸 그랬나 보다. 차에 오르자마자 건네는 나의 첫 질문이 마땅치 않다는 걸 기사님의 뒤통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말은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되묻는다. 그 따위 말이라고 할 것을 참고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다들 지가 못나서 당한 것이니 조심만 하면 괜찮다”라고 위로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했다.
소매치기가 있기는 한가 보다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손가방에 은근히 힘이 주어진다.
공항에서 시내 개선문 근처에 있는 호텔까지 가는 교통편은 아주 많았다. 14.5유로에 티켓 10 묶음이 들어 있는 카르네를 사면 지하철로 한 번이면 갈 수도 있고 17유로만 주면 개선문까지 가는 르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파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불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거금 65유로나 주고 한인 택시를 이용한 것이다. 순전히 파리 곳곳에 있다는 소매치기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런 소문들로 인해 비싼 돈을 주고 한인 택시를 이용했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왠지 떨떠름한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 20년을 살았다는 기사님은 이미 한국어를 잘하는 프랑스 사람이 되어 있는 줄 몰 랐다. 언어가 통하면 마음도 통할 줄 알았던 섣부른 생각이 난감해진다
우리의 이번 여행 중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을 숙소로 정한 곳도 있다. 낯선 타지에서 언어가 통하는 내 나라 사람과 만난다면 그곳의 정보를 미리 얻을 수도 있고 때론 타지에서 느끼는 경계심도 누그러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개선문이 보인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로터리를 돌자마자 호텔이 바로 나타났다. 어쨌거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자동차 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내려 주던 기사님이
“김치를 가져오셨나 봐요 김치 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데요”
라며 여태껏 짓지 않고 있던 미소를 날리며 활짝 웃는다.
제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남편의 식성 때문에 나는 곰삭은 김치를 꼭 묶어서 트렁크 깊숙이 넣어 왔다. 그런데 그 냄새를 기억하다니,
20년을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처럼 산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김치 냄새에 배가 고파지는 당신은 역시 한국인이었군요,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인사하고 돌아가는 그 사람을 나는 하마터면 붙잡을 뻔하였다.
여행 중에 김치를 꺼내 먹을 때마다 한인 택시 기사님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 올랐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한국에 온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이 너무나 변했다고 한다. 나라 경제도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전에 느꼈던 사람들의 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신들은 그래서 오히려 모국보다 자신들을 품어 준 나라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여행을 한답시고 해외에 나가서 당한 일들을 거르지 않고 거침없이 쏟아내는가 하면 단 며칠 동안의 여행으로 마치 그 나라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올린 글들이 난무하고 있다. 내가 파리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도 여기저기에서 함부로 섭식한 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금 전에 만난 기사님에 대하여 잠깐 가졌던 내 생각도 편협했다. 두 나라의 다른 문화 속에서 지금을 사는 그는 두 개의 강물이 서로 합하여 이룬 큰 강물인지도 모른다
모두 다 지가 못나서 당한 일들, 한인 택시 기사님의 이 말은 여행 내내 나를 긴장시켰으며 혹시라도 서투르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매사에 조심을 하였다.
이곳 프랑스에서 20년을 살았다는 한인 택시 기사님의 한마디 말은 어쩌면 모든 여행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어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