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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설계하다

by 연희동 김작가


언젠가 아이들이 “엄마는 무엇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선물 사기가 망설여진다”는 말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우울해졌다.


참 많은 말을 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는 한참 모자랐던 것 같다.

나라고 어찌 좋아하는 것이 없을까? 예쁜 그릇들도 좋아하고 브랜드의 옷도 철 지난 것이 아닌 그 해 유행하는 신상으로 사 입고 싶다. 뮤지컬이나 연극 관람을 하고 난 뒤 포장마차에 들러 밤에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묻히고도 싶다. 그보다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천천히 걷다가 머물다 가는 여행이 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바쁘게 다닌 여행지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모로코의 패스 골목길에서는 하루를 전부 투자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장 한편에서 양철 그릇에 못 자국으로 수를 놓는 아저씨의 유연한 손놀림을 오랫동안 앉아서 감상하고 싶기도 하고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에 가기 전 잠깐 들른 동화 속 그림 같은 마을 라스토케에서는 하룻밤 묵고도 싶었다. 가이드가 선심 쓰듯 정해 주는 시간에 맞춰 정신없이 다니다 보면 정작 보고 싶은 것을 지나치고 말 때가 가장 아쉬웠다.


슬로베니아에서 드브르 니크로 가는 길에 국경 근처에서 갑자기 수많은 난민들이 들이닥쳤을 때, 검문소에서 발이 묶인 긴 시간을 아까워만 한 게 너무나 죄스럽다. 지금이라면 자유를 향해 생명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라도 가졌을 텐데...,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 한 날, 실없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설렌다. 아직은 젊음이 한 꼬투리 남은 모양이다. 어떤 디자이너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시중에서 찾을 수 없어서 직접 디자인을 해서 입다 보니 어느덧 디자이너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여행도 우리의 속도에 맞게 직접 계획을 세워 보기로 했다.


언제


15년 전 영국에서 공부하는 딸아이와 함께 서유럽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의 방학에 맞춰 떠난 7.8월 유럽의 날씨는 연일 최고치를 치는 무더위로 도시는 마치 달궈놓은 가마솥과도 같았다. 그 해는 이상 기후로 인해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폭염과 장마가 덮쳐서 유난히 몸살을 앓았던 해였다.

때 마침 로마에서 폭염과 마주쳤다. 포로 로마노의 언덕길에서 더위에 녹아내릴 듯한 내 몸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지친다. 아무리 역사 깊은 유적이라 해도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는 모든 게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더운 날엔 절대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9,10월 단풍의 계절도 여행을 하기엔 알맞은 계절이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유럽의 날씨는 언제 차가워 질지 모르기 때문에 날씨에 대비하여 두툼한 옷을 챙기다 보면 여행가방은 자연히 무거워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일 년 중에서 오월을 가장 좋아한다. 딸아이가 결혼 날짜를 상의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오월을 택했다. 오월의 신부가 된 딸과 함께 결혼식장이 있는 지방의 국도를 달리면서 바라본 풍경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식물의 잎은 오직 연두와 초록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오월의 나뭇잎은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 어떤 이파리가 초록의 본바탕에 노랑을 더 많이 머금고 있느냐 에 따라 연두…, 그린… 네이비... 네이비블루... 퍼머넌트 그린… 세루 비안 블루… 등, 진하고 연한 나뭇잎들이 오월의 숲에서 푸른 숨을 내 쉬고 있다.

내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오월과 잠시 헤어지는 게 괜찮다면 오월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의 오월은 낮 시간이 길다. 많은 것을 보고 싶은 여행객들에겐 해가 길어 낮 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더구나 유럽은 이 시기가 비수기이다. 당연히 성수기에 비해 모든 요금이 저렴하다. 나는 오월에 여행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로


어디로 떠날까?라는 말이 이처럼 가슴을 설레게 할 줄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 오빠들의 책꽂이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에서 처음으로 문학과 마주했다. 평소에 내가 읽었던 전기문이나 동화가 아닌 소설이라는 장르는 나에게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에서 알퐁스 도데가 지은 '별'을 만났다. 양치기 소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주인집 딸의 모습을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묘사한 내용은 지금도 문장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나뭇잎에 물방울 듣는 소리, 개천에 물이 좔좔 흘러넘치는 소리, 그 안에 섞여 노새의 방울소리가 들리며 언덕 위로 점점 나타나는 스테파네트의 모습’

이 글을 읽을 때면 나도 양치기 소년의 마음처럼 가슴이 뛰곤 했었다. 아마 그 무렵 나에게도 사춘기가 다가왔고 나도 양치기 소년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언덕에 히스 꽃이 만발하고 밤이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곳, 붉은 지붕을 얹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뤼베롱 산맥의 줄기가 이어진 들판에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곳, 책을 읽으며 나는 프로방스의 벌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을 여러번 보았다.

칸에서 파리로 가는 2박 3일의 여정이 담긴 화면에는 어린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영화속에 비친 풍경은 나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줄거리를 보았고 그다음에는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방스의 넓은 들판과 낡은 수도교 아래에서 또는 중세의 무너진 성채를 바라보며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주인공 앤을 보며 다시 사춘기를 맞은 소녀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이제 내가 앤이 되어 볼 차례다.

오월의 프로방스를 여행지로 정하자는 내 의견에 남편도 동의하였다.

어떻게 갈까?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갑자기 준비할 게 많아졌다.


남편은 계획을 미리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여행을, 나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변화를 주는 유연성 있는 여행을 선호한다. 서로 의견이 어긋날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계획은 하나하나 완성되고 있다. 지금껏 살면서 이처럼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것 중에 하나를 이미 얻은 듯하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항공권을 예약하는 일이다. 파리에 도착하여 여행을 한 뒤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오는 국적기로 예약을 했다. 우리 부부가 그동안 쌓아 둔 마일리지로 왕복 항공료는 해결되었다. 덕분에 여행경비가 훨씬 줄어들었다. 뭐든 열심히 모아둔 보람이 있는 것 같다.

남 프랑스는 전세기 외에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가는 직항 편이 없다. 파리에서 다시 니스나 마르세유로 가는 국내선을 타야 한다. 파리에서 니스로 가는 노선은 TGV로 정했다.


교통은 도시 간 연결은 TGV로, 시내는 지하철보다는 버스나 택시, 또는 자전거를 빌려 타는 계획을 세웠다. 프로방스 내륙 지방에서는 승용차를 랜트하는 것이 유익했다. 숙박은 호텔과 민박 에어비앤비 등 다양하게 체험을 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여행을 할 수 없으므로 한 도시를 거점으로 하여 일주일 씩 머물면서 주변 도시를 둘러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이 완성되었다.


*파리 거점 (옹필뢰르, 몽생미셀. 생 말로, 오베르 쉬르 우아즈 , 지베르니 )

*니스 거점 (칸, 앙티브, 에즈, 모나코, 망통, 생 폴 드바스 , 무스티에 생트 마리, 베르동 협곡 )

*마르세유 거점(이프섬, 프리 울 섬)

*살롱 드 프로방스 거점 (릴 쉬르 라 소르그, 엑상 프로방스 )

*아비뇽 거점 (아를, 님, 퐁텐 드 보퀼리즈, 루시옹, 레보드 프로방스, 고르도 )

*바르셀로나 (몬세라토, 시체스)


외국어라면 겁부터 나는 나와 달리 남편의 영어 실력은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꽤 수준급이다. 덕분에 비행기와 기차 호텔 예약. 자동차 랜탈 등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는 은근히 아이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엄마 아빠가 여행을 떠나겠다고 할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하던 아이들도 막상 준비를 시작하면서는 전혀 도와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전전긍긍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했다.


때마침 프랑스의 기차 노조가 파업을 하면서 힘들게 예약한 TGV가 그 시간에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왔다. 또 다시 수정해서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 동반자가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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