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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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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01. 2021

술에 취한 당신 노을에 취한 나

들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람, 남편의 주량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술을 마시면 혹시 실수를 할까 봐서 인지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혼해서 40년을 넘게 살아온 지금까지 술을 마시는 건 봤지만 술주정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냥 곯아떨어지는 게 술버릇인가?  아무리 많이 마셔도 다음날이면 거뜬히 일어나서 출근을 하는 남편이었기에 그가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하여 걱정도 참견도 하지 않았다.


은퇴 후 집에 있으면서 자연히 즐겨하는 술도 멀리하게 되었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코로나에 밀려 멀어졌다.

선천적으로 알코올과는 친하지 못한 나는 술을 즐겨하는 남편의 취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 집에서 김포 신도시까지는 자전거 길로 30.2km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자전거의 전기 충전 주행거리는 40km, 남편 친구가 사는 김포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충전을 하여 돌아 오자는 획을 세웠다.

왕복 60km 주행은 지금까지 라이딩 중 가장 먼 거리를 달리는 셈이다.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일방적인 우리의 계획을 친구 부부는 흔쾌히 받아 주었다.

교각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가양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한강 하류의 물결을 바라보며 아라뱃길을 향해 달린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이곳 갑문을 지나야 김포 초입이 나타난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물길 아래로 뚫린 터널을 지나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면 확 트인 전원의 풍경이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수 없는 풍경이다.

하얀 조팝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오솔에는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한강의 물길이 천천히 흐르고 있고 강변의 갈대밭에는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갈매기들이 날기를 멈추고 잠시 쉬고 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보면 다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고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생긴다.


서쪽으로 갈수록 한강변의 모습이 조금 전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강줄기를 따라 둘러쳐진 철조망이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는 듯 겁을 준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신기루처럼 멀리 고층아파트가 나타나고 어느덧 친구의 집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마라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인데 솜씨 좋은 안주인은 후다닥 잘도 만들어 낸다.

특이한 향을 가진 소스에 온갖 야채와 얇게 썬 소고기를 국물에 데쳐 적셔먹는 요리, 그 진한 소스 향은 내가 그동안 거부했던 고수조차 맥을 못 추게 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고 있는 새로운 맛이 많구나.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의 잔을 채워 주기에 바쁘다. 알코올 도수 높은 중국술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있다.


자전거 배터리가 충전되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시간 중에는 술을 깨야 할 시간도 포함되었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다섯 시 전 후에는 출발을 해야 할 텐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자전거 배터리는 이미 충전이 다 되었는데 남편은 아직 충전이 덜 된 듯하다. 마신 술이 깨기를 기다려 해 질 녘에야 출발을 했다. 야간 라이딩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는 지는데 길을 헤매고 있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듯 남편은 자꾸만 자전거 내비게이션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핑계를 댄다.


나는 기계치인 데다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에 다행히도 길눈은 제법 밝다.

여행 중에 길을 잃었을 때도 내가 있는 곳과 가야 할 방향만 알면 어떻게든 목적지를 찾아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갈 길도 멀고 조금 후면 해가 질 것이다. 조급함이 불안함으로 변한다.

김포신도시에서 한강변 자전거 진입로를 찾아가야 하는데 주변에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낮에 오던 길을 가늠해서 길을 찾아 달렸다. 낯익은 건물과 오던 길에 익혀 두었던 상호명을 기억하며 길 찾기에 능력을 총동원했다.

드디어 자전거 전용도로 진입로를 찾아 들어서게 되었다.

둘러 길을 찾아오느라 내가 훨씬 남편을 앞질러서 달렸다.


휴..., 한강변에 이르자 그제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을과 하나 되어 달려오는 남편의 모습


내가 그림을 배울 때였다. 일출과 일몰의 풍경이 거의 똑같은데 어떻게 구분해서 그려야 되냐고 선생님께 물었다.

그걸 꼭 구분해서 그려야 할 필요는 없어요, 우문에 현답이다. 지금 바라보니 그렇다. 지는 해든

뜨는 해든 그 빛은 아름답다. 노을빛이 좀 더 따뜻하다고 해야 할까? 오늘의 노을은 유난히 붉다. 서쪽 하늘이 온통 연보라 진달래 꽃밭과도 같다.


멀리 노을 한가운데 남편이 까만 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급한 내 마음과는 달리 아주 천천히 오고 있었다.


남편의 등 뒤로 흥건히 취한 하늘이 있고 노을빛에 물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서서다가오고 있는 모습.


노을이 마술을 부리지 않고서야...,

남편이 가까이 다가오면 내 길 찾는 솜씨가 어떠냐고 우쭐대거나 좀 더 서두르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에게 화가 나 있었다. 제시간에 출발을 하지 않은 것과 길을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밉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저녁녘, 노을을 배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순간 그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리도 잘 어울릴꼬...


나는 그림을 감상하오래도록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러다가 순해진 내 마음의 정체를 알았다.


루를 수고하고 지는 태양이 남겨놓은 빛, 뜨거운 열정은 사라졌지만 잔잔하고 따뜻한 노을이 지는 풍경에서 남편과 나의 시간을 본 것이다.

눈부시지 않고 사물을 부드럽게 비추는 석양의 시간은 짧지만 하루 중 가장 진솔한 시간이다.


노을에 취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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