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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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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03. 2021

기다림에 지치지 않기를...,

 19년 전 솜털처럼 동그란 아이가 나에게 왔다. 45000원에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내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돈을 주고 미용을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아이, 데리고 나가면 다시 한번 뒤돌아 보는 눈길을 느낄 때마다 나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론 으쓱하였더랬다.

저보다 한 살 많은 형 강아지를 따라다니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형이 하는 대로 배변 잘 가려서 예쁨을 받던 강아지는 우리 집 마스코트였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침마다 형 강아지의 눈을 핥아주던 귀염둥이, 둘이는 그렇게 사이좋게 17년을 살았다.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강아지들 또찌와 세찌


2년 전, 늘 함께 있던  형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 간 이후로 급격히 노쇠해지더니 허리가 굽고 눈도 귀도 어두운 노견이 되어버렸다.  

유리창에 붙은 파리 잡기가 특기였고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을 반기느라 명치만큼이나 높이 뛰어오르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변하는 걸 보면서 애틋한 정을 상실한 아픔이 동물이라고 해서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작년 여름휴가 때, 아이와 마지막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 줄 알았는데 긴 겨울을 잘 넘기고 봄을 맞았다, 눈은 더 어두워졌고 눈사람처럼 포근했던 털은 엉성해져서 군데군데 갈색 얼룩이 물든, 어디서고 예전의 귀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초췌한 노견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 하지만 아마도 올여름휴가는 기대하지 못할 것만 같다.


얼마 전독립하여 나간 아들은 가끔 집에 오면 아이부터 찾는다. 이 아이가 있기 때문에 더 자주 집에 오는 것 같았다. 우리 강아지 역시 가족 중에서 나의 아들을 가장 잘 따랐다. 


최근에 아들은 해외를 나갔다.

아들이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도착하기 이틀 전. 갑자기 강아지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음식도 거부한다. 지금 까지 잘 견뎠는데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지...,


다행히 아들이 오는 날까지 잘 견뎌 주었다.

2주간의 자가격리기간 동안 아들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마지막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둘의 만남을 위해 조심스럽게 준비를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깨끗이 씻기고 헝클어진 털도 다듬어 주었다. 전 같으면 싫다고 앙탈을 부렸을 텐데 그럴 힘도 없는지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공항에 도착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곳에서 코로나 검사를 미처 받지 못하고 귀국한 입국자는 집이 아닌 지정된 호텔에서 격리를 해야 한단다.

이 나쁜 소식은 나보다도 우리 강아지에게 더 실망스러운 소식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

사라져 가는 심지를 돋우는 심정으로 안타까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림에 중독되었을 아이에게 또다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해야 하다니...,


잘 견뎌줄까?

그들의 나이로는 백 살에 가깝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작은 아이이며 귀여운 강아지 일 뿐,

지금껏 한 번도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는데 요즘에는 뒷다리에 힘이 없어 자꾸만 주저앉는다. 

걷지를 못하니 오줌을 눕고 그대로 뭉개버리고 아무 곳에서나 배변을 한다.

그래도 좋다. 너를사랑한 형아가 올 때까지만 견뎌다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강아지부터 살핀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호흡의 균형을 확인하고 품에 안으면 따뜻함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심장의 작은 팔딱거림이 나에게는 거대한 울림으로 들리며 새로운 하루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내가 곁에 가면 꼬리를 흔든다. 커다란 청소기 소리에도 무덤덤해진 지 오래인 강아지가 내 발자국 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놀라움이다.


하루는 짧은데 기다림의 시간은 왜 이렇게 길기만 한지. 2주간의 기간 중 이제 겨우 반도 지나지 않았다.

가족들이 없는 빈 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강아지의 외로움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팔짝팔짝 뛰면서 온몸으로 기쁨을 나타내던 강아지의 격한 표현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집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진다는 아들과 영상통화를 한다.

''또찌야 형아가 갈 때까지 기다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아들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우리 강아지 또찌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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