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위기

by 연희동 김작가

여행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 이제는 전처럼 발 편한 운동화에 바지만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행복하다. 오늘부터는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남프랑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프로방스의 진짜 시골을 체험할 계획이다.


일요일인 내일은 당장 유럽의 3대 벼룩시장 중에 하나인 닐 쉬르라 소르그의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오늘은 고속도로가 아닌 아기자기한 국도를 타고 엑상 프로방스를 거쳐 살롱 드 프로방스에 짐을 풀 예정이다.


마르세유 기차역 앞에 있는 렌터카 회사에 호기 있게 들어갔다. 이미 예약은 인터넷으로 해 놓았고 보험료를 비롯한 렌트 비용은 결제를 마쳤기 때문에 준비한 서류( 국제 운전면허증과 여권,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내 운전 면허증)를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안전을 위해 수동이 아닌 오토매틱으로 운전할 수 있는 승용차로 주문했고 이제 자동차 키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 런. 데

서류를 훑어보던 직원이 갑자기 서류를 돌려주며 농~~~ 하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금까지 프랑스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했다. 하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뿔싸…

남편이 자신의 국내면허증을 준비해 오지 않은 것이다. 대신 복사한 면허증을 보여줬으나 원본 외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나 단호해서 부탁해 볼 여지도 없었다. 여행 중에 맞은 최초의 위기다. 중요한 것은 렌터카 여행도 포기해야 되지만 이미 지불한 렌트 비용까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서류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베르동 협곡을 함께 여행했던 신혼부부에게 이와 비슷한 경우의 실수담을 들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동차를 렌트했지만 예약자인 남편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를 가져오지 않아서 선불한 금액을 모조리 환불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여행 중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렌터카를 빌리지 못하면 여행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더구나 프랑스의 오월은 기차노조의 파업이 잦아서 열차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기는 극복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렌터카는 포기하겠지만 렌트 비용 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생 크로와 호수 앞에서 차창 소매치기 사고가 생긴 날 경찰서에서 간단한 조서를 작성한 것이 있었다. 보험회사에 제출할 서류였다. 갑자기 그 서류가 생각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때 작성한 서류에는 잃어버린 가방 안에 들어있던 물품의 내역이 적혀있었다. 스카프, 열쇠, 양산, 동전지갑 등..., 그중에 동전 지갑을 캐시 백이라고 적었던 게 생각났다. 케쉬 백 안에 동전만 넣어놓는다는 법은 없다.

렌터카 직원에게 서류를 보여 주었다. 어디에도 국내면허증을 도난당했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요구하였다. 가방도 도둑맞고 타보지도 못한 자동차 비용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너희들에게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원본을 도둑맞았으니 너희는 당연히 복사한 면허증으로 차를 빌려줘야 마땅하다고 유창한 한국말로 설명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설명이 아니라 우긴 것이다. 남편은 내가 하는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직원들에게 전했다.


랜트 회사 직원은 자기들끼리 한참을 대화를 나누더니 그렇다고 해도 복사한 면허증으로는 자동차를 렌트해 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렌트 비용만은 돌려주겠다고 한다.


갑자기 캄캄한 하늘에서 불꽃이 펑펑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가방이 날려버릴 뻔한 렌트 비용을 찾아주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현대판 새옹지마다. 렌트 비용과 차량 보험료가 정확히 입금되었다. 하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으로 가는 내 마음은 가방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