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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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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Sep 12. 2021

우리들의 아름다웠던 날들


기다렸던 전화가 왔다. 반가운 소식이길 바랐는데 걸려온 전화는 그 반대의 소식이었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 한 마디로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생각지도 않은 이별이라니.,


작년 11월, 아들에게 전기 자전거를 선물 받았다. 나는 자리에서 바로 '샤넬'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더랬다. 앙증맞은 작은 바퀴와 날렵한 허리를 가진 자전거는 디자인이 무척 고급스러웠다. 샤넬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나에게는 명품 그 이상이었다.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코로나19의 출현은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여행도 할 수 없고 친구도 만날 수 없다. 취미활동은 물론 일요일에 성당을 나가는 것마저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변화된 생활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내게 온 자전거 샤넬은 친구이자 같은 취미를 가진 동료였다. 나는 그 어느 보다도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날씨가 풀리고 언 땅이 녹자마자 우리는 매일 라이딩을 나갔다. 탁 트인 한강변을 달리면서 남들보다 더 먼저 봄을 느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바라봤던 한강변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강변 언덕에 핀 풀꽃들과 찰싹거리는 한강의 물결소리를 가까운 곳에서 들으면서 이곳까지 나를 데려다준 자전거에게 고마워했다. 샤넬이 없었다면 나는 봄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걸어서는 멀고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길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여의도 공원과 일산 호수공원, 더 멀리 북한산 초입 까지, 한강을 건너 김포에 사는 친구네 집에도 다녀왔다. 쑥도 캐고 오는 길에 꽃도 사고 맛집에 들러 맛있는 식사도 했다.

종아리에는 전에 없던 탄탄한 근육이 생겼다.


여름에는 자전거 타기도 힘들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남의 집 주차장에서 먹구름이 물러나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한 낮을 피해서 새벽녘과 저녁 무렵에 집 근처만 달려도 온몸이 땀에 홀딱 젖었다.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샤넬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즐겼던 풍경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각 나라가 봉쇄되면서 한편으로는 대기질이 개선되었다는 말이 맞는 듯. 오늘 아침.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에는 예전에 보았던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있었다.

샤넬과 나는 한 몸이 되어 달렸다. 오랜만에 달려보는 라이딩이라서 어느 때보다 더 즐거웠다.

동력으로 달리는 샤넬은 언덕길도 숨 가빠하지 않았다. 한강변에서는 나보다도 더 익히 길을 안다는 듯 여유롭게 달렸으며 우리가 자주 가던 노을 공원에서는 가장 뷰가 좋은 장소로 노련하게 나를 안내하였다. 남편과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샤넬은 벤치 옆에 서서 얌전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쉬다가 한강이 붉은 노을로 물들 때쯤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가자! 샤넬,

런데 웬일인지 샤넬이 힘이 없다.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웬일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까지 잘 달려왔잖아 누구와 부딪힌 적도 넘어진 적도 없는데 갑자기 왜 기운이  없는 거지? 계기판에는 No 20이라는 숫자가 다. 샤넬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No 20은 콘트럴러 통신 불가라는 표시다. 샤넬은 지금 뇌신경이 아픈 것이다. 동력이 전달되지 않는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보다 느린 속도로 나를 힘들게 했다.

아...  어쩌면 좋으니

샤넬을 자전거 병원에 맡기고 왔다.  예쁜 샤넬을 뭇 자전거들과 함께  그곳에 두고 오려니 마음이 아팠다.


샤넬은 짧은 기간이지만 참 많은 추억을 가져다준 자전거다.

처음 자전거를 만난 날, 나는 브런치에 '이제는 더 이상 페달을 굴리지 않아도 된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때. 우연히 잡지사 에디터의 눈에 띄어 함께 잡지에 실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었다. 언감생심, 샤넬이 없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샤넬과 나는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다. 함께 제주도 해안도로를 일주한 뒤에는 천천히 자전거길을 따라 남쪽으로, 다시 남쪽에서 동해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는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었다.

아직 그 계획에 첫 발도 떼지 못했는데 이렇게 이별을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았을까?


누구는 그깟 자전거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친구를 잃은 기분이다. 봄부터 지금까지 어디든 나와 함께 다녔던 샤넬은 내 친구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를 가르치시던 영어 선생님께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시면서 남긴 말씀이 기억난다.

"내가 어제 자전거를 잃어버렸어요 서울 가서 그 자전거를 찾으면 꼭 다시 올게"

이 보다 더 멋진 이임인사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은 학생들과 헤어지는 것보다도 매일 자신을 태우고 다녔던 자전거와 헤어지는 게 더 서운했던 것 같다. 정말 자전거를 잃어버리신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전거는 자신의 첫 부임지였던 정든 학교였고 사랑했던 제자들이었으며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가던 논두렁길이었을 것이다. 자전거는 선생님의 그리움이 될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사계절도 함께 보내지 못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샤넬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이토록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걸 보면  그때 선생님의 심정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아직 서비스 기간이 남아있어 어떤 조건이 되든 나에게는 또 다른 자전거 친구가 생길 것이다.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될 자전거는 고급스럽고 예쁜 이름보다 조금은 투박한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 예쁘지 않아도 좋으니 좀 더 다부지고 튼튼한 자전거 친구였으면 한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맞다. 나의 예쁜 자전거 샤넬은 그렇게 내 곁을 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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