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월도 중순에 들어섰다, 예년이라면 잔디가 파릇해지고 벚나무에 망울이 맺혔어야 맞다.
아무래도 봄이 남녘 끝 어디쯤에서 해찰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멀리 제주도로 봄 마중을 다녀왔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후끈한 봄바람이 품에 안긴다. 이런..., 내가 옷을 너무 두껍게 입고 왔나 보다. 이처럼 따뜻한 환송을 기대하지 못하였기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렌트한 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서귀포로 가는 동안 길가에 핀 노란 유채꽃이 제주는 지금 봄이라고 말해 준다.
유난히 긴 겨울이었다.
코로나 일일 확진자 수가 세계 상위권에 웃돌고 강원도 산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일주일 넘게 불타오르고 있다. 20대 대통령으로 나선 두 명의 후보는 상대방 헐뜯기에만 혈안이 되어 이번 대통령 선거가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될 것이라 하였다. 어쨌든 국민의 의무는 지켜야겠기에 덜 비호감인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내주고 바로 제주도로 왔다.
지난겨울 제주여행을 할 때 서귀포는 온통 노란 귤밭이었다. 황금빛 귤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이 무척이나 풍성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는데 봄날의 제주는 역시 샛노란 유채꽃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길 옆에도 언덕에도 들판에도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유채꽃이 피어있는 제주도,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게 싫었는데 유채꽃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지릿한 꽃 냄새와 꿀벌들의 윙윙 거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카메라에 모습을 담는 사람들, 꿀벌도 사람도 서로 제 할 일에 열중이다. 성산포로 가는 길에 넓게 펼쳐진 유채밭이 노란 꽃 바다라면 중문단지 엉덩물 계곡의 유채꽃은 샛노란 시냇물이라고나 할까? 계곡이 깊어서 물을 마시러 오는 짐승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이밀고 볼 일만 보고 갔다는 엉덩물 계곡의 유채꽃길은 이름만큼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었다.
엉덩물계곡의 유채꽃길
우리 땅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 하는 곳, 나는 이곳 제주에서 봄의 속살을 보고 싶었다.
맨 먼저 숙소에서 가까운 7코스 올레길을 걸었다. 제주에서도 가장 따뜻한 남쪽 서귀포 해안을 따라 걷는 길, 강정마을 앞 해변에서 외돌개까지의 해변길을 걷는 동안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짙고 푸른 바닷물빛과 아슬한 절벽 그리고 숭숭 구멍이 뚫린 동굴들, 육지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기후와 키 큰 야자나무가 이국의 풍경을 안고 있다.
겨울에 핀 매화는 이미 낙화가 되었고 동백꽃은 새들의 울음소리 한 번에 후드득 떨어진다.
남원읍 신흥리 마을의 동백나무 숲은 꽃이 피었을 때도 물론 좋았겠지만 꽃이 지고 있는 이맘때쯤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이렇게 호젓한 산간 마을에 3백 년이 넘게 자란 동백나무 군락이 있는 줄 몰랐다. 고목이 된 동백나무에서 어깨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지는 꽃의 듬직한 스침을 느껴보는 것도, 붉게 물든 꽃길을 걸어 보는 것도 딱 이맘때쯤 느끼는 정취일 것이다. 나지막한 돌담장 위에 수북이 떨어진 동백꽃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원읍 신흥리 동백 숲 마을
송악산 둘레길도 이번에 처음으로 걸어보는 올레길 여정이다, 멀리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를 바라보며 절벽 위로 난 길을 걷는 코스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깎아지른 절벽과 용암의 꿈틀거림이 그대로 굳어버린 화석이 조화롭다. 산 정상의 너른 갈밭에서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다. 참 평화로운 모습이다. 차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자동차를 주차장에 두고 올라온 우리와 달리 멀리 삼방산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은 꽤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봄날의 제주를 온몸으로 느끼기에 올레길 탐방은 더없이 좋은 여행길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여행 중에 봄비가 내렸다. 한라산 북편 봉우리에는 여전히 하얀 눈에 덮여있었지만 봄비 한 번으로 민낯을 드러냈다.
우리는 비옷으로 무장하고 섭지 코지와 성산 일출봉을 다녀왔다.
봄비치곤 꽤 억세게 오는 비였다. 바람 때문에 우산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언제부턴가 여행 중에 날씨에 대하여 무심하게 되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우비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꽤 괜찮았다. 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어제는 유채꽃밭의 벌들의 윙윙거림과 동백숲 새들의 울음소리가 자연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서막이었다면 오늘은 빗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파도소리가 한데 어울려 교향곡의 절정을 들려주는 듯하였다.
바람소리 빗 소리 파도소리가 들리는 성산포
마지막 날, 제주에 있는 수많은 오름 중에 두 개의 오름을 선택하여 올라갔다. 봄이면 갈대를 태우는 들불축제로 유명한 새별 오름과 꼭대기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군산 오름이다. 새별오름은 황금빛 갈대로 덮여있다. 그 아래 넓은 주차장이 마련된 것을 보면 들불축제의 위력이 얼마만큼인지 알만하다. 오름 전체를 휘감으며 훨훨 타오르는 불길을 상상하는데 자꾸만 뉴스 속에서 본 강원도 산불이 오버랩된다.
새별오름을 오르다가 갈대밭 사이에서 한 무더기 할미꽃을 보았다. 곧 들불을 피우게 되면 함께 타 버릴 텐데 하필 저런 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앞으로의 일을 예견하지 못하는 건 사람이나 식물이나 다를 게 없다. 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옯겨주고 싶지만 마음뿐, 꽃을 활짝 피운 할미꽃이 안타까워서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새별오름의 안타까운 할미꽃
제주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는 동안 하루가 다르게 봄이 짙어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겨울꽃인 매화나 동백은 지고 있고 물 오른 벚꽃나무는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민속마을 뒷 뜰에는 머위잎이 돋아났고 송악산 등성이에는 쑥과 방풍나물이 웃자라 있었다. 냉이꽃과 민들레는 유채꽃에 가려 시선을 끌지 못하였지만 빈 땅을 아름답게 메꿔주고 있다. 누런 갈대만이 지난겨울의 자취를 안고 있다.
계절은 자연의 순리대로 서로 교체한다. 인간도 이처럼 자연의 섭리대로만 산다면 충돌하지 않고 무난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제주시내 곳곳에 현수막이 걸렸다. 뽑아줘서 고맙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인사와 부족해서 죄송하다는 상대방 후보의 인사가 담긴 현수막이다.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의 문구이지만 예전의 헐뜯던 모습을 보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내가 지지한 사람이 당선이 되면 좋겠지만 혹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 모두의 소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국민의 마음을 살필 줄 알고 나라를 평화롭게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지난겨울 아우성을 잠재운 봄은 세상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제주는지금 봄이 완연하다.
봄아 나랑 서울로 가자,
한라산에 철쭉이 필 때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고 나는 남녘 땅 제주도를 노랗게 물들인 봄과 함께 이제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