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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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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15. 2022

나를 위한 도시락

요즘 나는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싼다. 어느 날은 김밥을 싸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집에 있는 반찬을 찬합에 넣어 간단하게 준비하기도 한다.

오늘은 텃밭에서 상추를 땄다. 보름쯤 전에 모종을 사다 심어놓은 상추가 그새 먹을 만큼 자라서 잎을 내주었다. 오늘 도시락은 상추쌈을 준비했다.


상추쌈에 고기가 빠질 리가 없다. 그래서 제육볶음을 만들었다.

얼큰 달큼한 고추장 양념에 버섯과 양파 당근 등 채소를 넣어 두루치기 한 제육볶음과 아삭한 상추와는 최고의 만남이다.


근에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였다. 잔디 위에서 공을 쳐서 홀에 집어넣는 파크골프다. 출퇴근을 하면서 한강변을 지날 때마다 자주 보던 운동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저 미니골프장 정도로 생각하고 연로하신 분들이 여가활동으로 즐기는 놀이인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직접 체험해 보고 나서 나에게 맞는 자연친화적인 운동이라는 걸 알았다.

남편의 오랜 친구 부부와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매일 운동을 한다.

골프를 하는 친구라서 가볍게 여길 줄 알았는데 남편의 친구 부부 역시 나처럼 파크골프의 매력에 빠졌다.


널찍한 공원의 잔디 위에서 하는 이 운동은 평균 60~70미터, 혹은 100미터가 넘는 라인까지 열여덟 개의 코스가 있다. 깃발이 꽂힌 홀에 각각 주어진 만큼의 기준 타수대로 공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이 홀을 전부 돌면 웬만한 산책길을 걷는 정도의 운동이 된다.

하루 종일 운동을 할 경우 열여덟 개의 홀을 서 네 번씩 돌면 그만큼 운동량도 많아서 그날 밤 꿀잠은 예약된 셈이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공원의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서는 도시락을 준비했다. 디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풀어 먹는 재미는 학생 시절 소풍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

친구 부부네서로 번갈아 마련하는 도시락은 메뉴도 다양하여 먹는 재미도 있지만 매일 변하는 공원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도 크다.


도시락을 펴놓고 앉았던 자리에 파릇파릇 쑥이 돋아 나던 이른 봄에는 식사 후 빈 도시락 통에 쑥을 캐서 채워 넣기도 하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벚나무 아래에 펼쳐놓은 도시락 위로 꽃잎이 떨어져 때마침 마시려던 컵 속의 물은 벚꽃 잎차가 되기도 했다.

클로버라는 멋진 이름을 두고도 토끼풀이라고 불러야 정스러운 줄 아는 남편도 앉아있던 자리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에게는 예쁜 원래 이름을 붙여 주었다.

 

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제일 정성을 쏟았던 게 도시락이다. 오늘은 어떤 반찬으로 도시락을 만들까? 두부 한 모보다 작은 반찬통 안에 매일 새로운 반찬을 만들어 넣기가 어찌 그리도 힘들었던지, 김치를 싸 준 날은 혹시 국물이라도 흐르지 않을까 염려되고 두 어 개의 반찬을 함께 싸 준 날은 다른 반찬끼리 서로 뒤섞여 볼품이 없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엄마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책가방에서 꺼낸 빈 도시락은 그날의 도시락 점수가 들어 있다.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먹은 도시락을 보면 백 점짜리 엄마라도 된 듯 기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먹다가 남겨 둔 밥과 반찬이 들어 들어있는 날이면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고3 수험생이 되면서는 점심과 저녁, 두 개의 도시락을 들고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에 짠했지만 그 못지않게 엄마인 나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도시락 치닥꺼리에 지겨울 법도 한데 그것도 오래 하다 보니 솜씨가 늘었나 보다. 도시락 싸는 일이 그다지 성가시지 않다.

남편이 운동을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뚝딱 만든다.

다른 사람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나를 위해 도시락을 준비한다.

집에 있는 밥과 반찬, 커피와 과일이면 족하다. 비록 간단한 도시락이지만 즐기는 건 한참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먹는 점심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운동을 하다가 누군가 "먹고 합시다"라는 말을 기다린다.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시간도 많이 절약되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가는 시간과  식당 앞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도시락을 싸지 않았더라면 허비했을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계절의 변화를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덤으로 주어졌다.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별거 아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건강하게 운동을 하며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는 일상, 요즘에 나는 참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오늘의 점심 도시락은 꼬막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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