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Aug 20. 2022

가는 날이 장날


요즘 유튜브로 프랑스 자수를 배우고 있다. 얇고 부드러워서 아기들 기저귀로만 사용하는 줄 알았던 소창수를 놓아서 수건을 만드는 작업이다. 예쁘기도 하지만 실용성이 있어서 좋았다.  

수놓을 때 필요한 부자재와 천을 살 겸 동대문 종합시장으로 장보기를 갔다.


동대문 부근에 있는 광장시장의 녹두전은 소하고 두툼하여 그곳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녹두전을 꼭 사 먹는다. 

기름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두른 프라이팬에 물에 불려서 갈아놓은 녹두와 고사리, 김치, 돼지고기를 넣지져내 주는 녹두전은 크기도 만만치 않다. 작은 사이즈의 피자만 할까? 아무리 맛있는 피자라도 한 조각 이상 먹지 않는 나도 커다란 녹두전은 그 자리에서 뚝딱 해치운다.


외국인들의 입 맛에도 잘 맞는지 좌판에 앉아서 녹두전을 먹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았고 노점상 아주머니의 짧은 영어 실력이 이들과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도 신기하였다.


시장에서는 녹두전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지만 집에서  만들어 먹을 있도록 녹두부침개 재료를 팔기도  한다. 광장시장에 들러 녹두전 재료도 사 와야겠다. 오늘의 점심은 녹두전에 막걸리를 곁들여 먹기로 했다. 발 편한 운동화를 신고 동대문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시장에 가깝게 다가 갈수록 거리가 한적하고 문을 닫은 상가가 유난히 많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였다. 종로 6가 정류장에서 내려 동대문으로 가는 동안 어찌 주변 분위기가 싸하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 호떡집도, 전국에서 제일 싸게 판다며 과일과 채소를 수북이 쌓아놓고 손님을 호객하던 청과물상도 조용하다.

어쩐지..., 시장 입구에 철문이 굳게 내려져 있다.

언제나 8월 중순쯤이면 시장 상인들의 여름휴가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인들의 휴가기간인 줄 모르고 장을 보러 온 것이다.


평소라면 짐을 나르는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뒤섞여서 자칫 한눈을 팔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한 이곳지금은 썰물이 훑고 지나간 갯벌처럼 황량하다.

시장 안뿐 아니라 시장 밖 노점상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이곳은 시장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유적지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오기에는 뭔가 허전하였다. 그보다는 점심으로 약속을 해놓은 녹두전을 대신할만한 무엇을 찾을까 하여 텅 빈 시장길 안으로 들어섰다.


상가마다 새시가 내려져 있어서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시장 뒷길에 줄지어 있는 생선구이 가게는 달랐다.

기름에 찌들고 연기에 그을린 벽은 생선을 구워낸 세월 두께를 는 듯하고 불을 피웠던 화덕은 그동안의 노고를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일터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한 시장보다 오히려 텅 빈 시장 안에서 진한 삶의 냄새가 났다.


가게  물건들이 치워진 길은 그만큼 넓어져서 예전의 좁은 통로라곤 상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할까, 걸어가는 내 발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는 게 신기하였다.


오래전, 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환갑여행으로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함께 국내 여행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의 휴가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나는 친구와 함께 이곳 동대문시장으로 왔다. 친구의 집으로 가져갈 선물을 사기 위해서다.

중부 시장에서 멸치와 김 등 건어물을 사고 광장시장의 노상 음식점에서 손 만두와 녹두전. 떡 볶이를 먹었다. 종합시장의 5층에 있는 액세서리 상가에서 친구는 마치 날아다니는 듯했다. 자신의 손녀에게 줄 선물을 가득 사고도 더 사지 못해 아쉬워하며 지금껏  다닌 그 어느 여행지보다 이곳 시장이 가장 즐겁고 볼거리가 많았던 곳이라고 했다.


나 역시 큰 시장에 오면 느낌이 달랐다. 없는 것이 없는 이곳에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하나의 물건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재료가 필요한지 그 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부자재들이 모두 다 구비되어  있는 곳, 구역마다 다른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하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시장에서 치열한 삶의 흔적도 때론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일이면 감긴 눈꺼풀을 뜨듯 상점의 새시문이 올라가고 시장은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시장에 왔다가 비록 빈 손으로 돌아가지만 거대한 공룡이 들이키는 들숨과 내리 숨의 사이, 그 잠깐의 시간을 나 혼자 즐겼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