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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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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Aug 25. 2022

Dear  호박



'장마에 호박 크듯'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에게 하던 말이다.  평범한  비유로 인해 나는 지금껏 호박은 기후나 풍토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잘 자라는 여름 채소인 줄만 알았다.  특히 비가 오고 난 뒤엔 더욱 잎이 무성해지는 줄로만 알았던 호박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오늘 동네슈퍼의 야채 코너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호박의 가격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쇼핑백에 망설임 없이 넣었던 호박이었는데 오늘은 턱없이 오른 가격을 보고 그 앞에서 주춤하였다.

뒤늦게 시작한 장마로 인해 모든 채소값이 올랐다. 호박도 그들과 편승해서 함께 몸값이 상승했다. 긴 장마를 이겨낼 만큼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여 푸성귀라고 하대를 받는 다른 채소 들과 달리 왠지 호박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호박의 이미지는 값이 싸고 소박하며 푸짐하고 서민적이었다. 그랬던 호박이  갑자기 귀하신 몸이 되었다.

아무리 격상한 몸이라 해도 호박은  서민들의 밥상에  있어야 제 빛을 발한다.

깍둑 썰어 된장을 끓이거나 반달로 썰어 새우젓을 넣어 무친 호박 나물은 여름 밥상을 무난하게 만들어 주었다. 강된장을 끓여 쌈을 싸 먹는 여린 호박잎은 한여름 잃은 입맛을 돌아오게 하고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부침개도 호박이 들어가야 더 맛있다.


여름 동안 우리의 식탁을 채워주던 호박은 가을에 이어 겨울까지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노랗게 잘 익은 늙은 호박이 디어  몸을 푼다.  빛깔도 고운 샛노란 호박죽은 한겨울 식구들에게 달콤한 포만감을 안겨이웃들에게 정을 나눠주기도 한다. 

제사상에도 호박전은 빠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 조상들도 호박을 즐겨 드셨다는 증거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허물없이 지내던 호박이 갑자기 슈퍼의 진열대에 올라 새초롬하게 바라보고 있으 낯설 수밖에...


텃밭 한 모퉁이나 밭두렁 어디에나 터만  잡으면 무럭무럭 잘 자라던 호박. 한 여름 뙤약볕에도 초록의 넓은 잎을 키우고 지붕이나 울타리 등 그게 어디든 더듬이 같은 넝쿨손을 뻗으며 쭉쭉 기어올라 등불처럼 환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아무리 강한 빗줄기에도 끄떡 없다. 천성이 착했던지 마음처럼 넓은 잎으로 비를 가려 갓 태어난 애호박을 보호해 주는 모습에서 모성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초록 잎사귀 뒤에 숨어 반질반질  이 나는 아기 호박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본 적도 있었다.


이렇게 친근한 호박이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하여 나와 격을 두려 하니 이제라도 분수를 알고 제 자리로 돌아왔으면 한다.


호박은 호박 다울 때 호박이다.  몸에 비싼 가격표를 붙인다고 호박이 수박 되는 거 아니다.


친애하는 호박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주셔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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