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의 골목길은 밤이면 중세의 시간으로 되돌아 간다
처음 아비뇽에 왔을 때 골목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처음엔 길을 잃었지만 길을 찾는 동안 점점 골목길의 매력에 빠져서 골목여행이 되고 말았다. 중세의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때론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가게이기도 했다. 향수와 꽃, 아름다운 유리 장식들과 그릇. 구두, 등을 파는 가게이다가 화려한 드레스 샾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방을 만드는 장인의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으로 걷다 보면 수생식물이 온통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시장 건물이 나오고 또다시 길을 걷다가 문득 바라보면 교황청의 우뚝 솟은 담벼락과 마주한다. 골목길은 신기하게도 막힘이 없이 어디론가 뚫려있었다. 그러다가 멀리 물레방아가 보였다.
처음 숙소가 있는 골목길 앞에 유리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걸 보고 이곳이 우범지역이 아닌가 걱정했었다. 베르동 계곡에서 차창 소매치기 사고를 당한 뒤부터 유리조각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우려였음을 곧 알게 되었다.
오월의 프로방스는 저녁 아홉 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아예 저녁이라는 통과의례없이 바로 밤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짧은 밤이 아쉬워서 일까? 사람들은 해가 지면 모두 밖으로 나와 밤을 즐긴다.
하룻 내 문이 닫혀있던 이웃집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이 곳이 와인 바였다는 걸 낮동안에는 몰랐었다. 전혀 영업장 같지 않은 집안에 대문만 열렸을 뿐인데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가득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바라보면 창문으로 불빛이 켜진 집안의 모습이 환히 보인다. 넓은 식탁에 빙 둘러앉은 사람들, 둘 씩 셋 씩 무리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손엔 와인 잔을 들고 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왠지 골목 안이 훈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앞에 있던 개울가
숙소 앞에 집과 집 사이로 흐르는 개울이 있다. 낮에는 이 개울이 내가 사는 동네를 알려 주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개울 위에 놓인 좁은 다리를 건너야만 시청 앞에 있는 오를로주 광장과 교황청 그리고 론 강으로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다리는 내가 있는 숙소에서 중심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수로 곁에는 오래된 오동나무가 서있고 커다란 물레방아가 있다. 개울의 폭에 비해 물레방아가 무척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마을은 중세시대 옷감에 물을 들이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한다. 물레방아는 이 마을의 문화유산인 셈이다. 지금은 물도 그리 많이 흐르지 않고 폭도 좁지만 중세의 이 마을은 굉장히 역동적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그 아래에서 옷감에 물을 들이는 사람들, 개울에 흐르는 물빛도 그날 물들인 옷감의 색깔에 따라 다르게 바뀌었겠지..., 주변에는 온통 화려한 옷감들이 휘장처럼 바람에 날리고 앞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바쁘게 옷감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광경을 그려본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은 낮동안 지나다니는 사람이 뜸하고 개울가의 널찍한 돌바닥과 물레방아만이 중세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녁에 이 다리를 건너면서 낮의 모습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개울가를 보았다.
물레방아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작은 백열등 불빛이 개울에 반사되어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고흐가 그린 그림 속의 별빛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어른들을 따라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시끌벅적하다. 나무 탁자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푸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다시 중세의 활력을 되찾은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아비뇽에서 수제 맥주를 가장 잘 빚는 사람이 이 곳, 개울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밤이면 자신의 집 앞에 탁자와 의자를 내어 놓고 자신이 직접 빚은 맥주를 마시면서 친구들과 하루 정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소문은 천천히 퍼져서 저녁이 되면 이 곳 개울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 골목은 밤이 되면 낮의 얼굴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화려하고 세련된 큰 길가의 펍으로 가지 않고 외진 골목길에 있는 이 곳을 찾아올까? 정이란 건 약간은 허술하고 투박한 곳에서 싹트는 것 같다.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다. 늦은 밤 시원한 맥주를 앞에 두고 개울가 오동나무 아래 탁자에 앉아 있으면 너희 나라는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그 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맥주를 마시면 내가 원래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밤이 되면 이 곳은 중세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멈춰있던 물레방아가 다시 돌아가고 냇가에는 물들인 천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술잔을 부딪힌다. 아비뇽의 골목길은 밤마다 마술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