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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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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08. 2023

절벽 아래엔 푸른 계곡이 있다

길을 걷다가 돌멩이에 부딪히는 일은 우연이다. 그런데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길을 목적 없이 걸어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불운이든 행운이든 우연은 없다. 불운했다면  그 기류 속에 휩쓸리게 된 원인이 있고 행운을 얻었다면 기적이 없는 한 그만큼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인생의 도표를 그려본다. 내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점을 찍고 선을 이어가다 보니 불운과 행운의 교차점이 들쑥날쑥 작은 산봉우리를 만들며 거대한 산 하나가 나타난다. 때론 산책을 하며 즐기듯이, 때론 힘들게 땀을 흘리며 오르내리던 내  인생의 산, 사람마다 자신이 그린 능선이 다르다. 누군가는 완만한 뒷동산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험난한 산이기도 하다.

내가 그린 인생 그래프 역시 이리저리 꺾여서 오르고 내리는 등고선이 있다. 밋밋하면 재미없지, 잘 살든 못 살든 인생은 굴곡이  있게 마련이야. 그런 게 사는 맛이거든, 하지만 어느 해인가 저 아래로 뚝 떨어져 버린 점  하나, 그 절벽아래에서 나는 멈칫한다.

 

                            

구청 앞 광장의 하얀 이팝나무가 벚꽃이 진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나무 아래  사람이 서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피켓에 쓰여 있는 글씨가 아프다.


 '우리의 재산을 지켜주세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던 집 값이 하락하면서 집값보다 전세금이 웃도는 역 전세 현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집주인들은 기한이 지난 전세입자들에게 제때 보증금을 반환해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돈이 없어서 전세금을  내어주지 못하는 집주인은 그래도 양심이 있는 편에 속한다. 문제는 마음먹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전세금을 되받지 못하고 전재산을 날려버린 세입자들의 피해사례가 연일 방송에 보도되고 있다.


35년 전. 나도 저들처럼 암담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하루아침에 내가 살던 집은 은행에 근저당이 잡히고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그때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가쁘다.


싸움 끝에 간신히 아파트를 등기이전 하는 것으로 재산은 지켜냈지만 이미 입주할 아파트가 있는 우리에겐 반가운 해결책이 되지못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만일 그때 우리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내가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에서  또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살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빠른 길을 두고 멀리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인생의 절벽이라 생각했던 그 시절도 그런대로 살만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랐고 착한 이웃들도 만났다.


자연과  인간의 삶은 너무나 흡사하다. 낭떠러지 인 줄만 알았던 절벽아래 푸른 계곡이 있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있고 목을 축이러 오는 산 짐승과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있다.  꼭대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살아있는 것들이 그곳에는 다.

산봉우리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진 바다로 가는 길, 그 시작이 바로 절벽아래 계곡이라는 걸 살아보고야 알았다.


남들은 꽃놀이를 하고 있는 이 계절에 온몸으로 호소하 있는 전세피해자를 보면서 전날의 나를 본다.

계절처럼 불운도 지나간다. 혼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그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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