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May 12. 2023

위대한 밥상

해마다 사과꽃이 필 무렵이면 남편의 친구는 자신의 부모님이 사시던 전라도 무풍의 시골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한다.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사는 나는 봄날 이곳에서 시골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돌아오곤 한다.


계절은 양력보다 음력이 시절과 맞는다. 도심의 거리에 석가탄신일 연등이 준비되기 시작하면 우리  등나무에는 보랏빛 꽃이 어김없이 핀다. 갈등이란 단어가 외관상 서로 구별하기 힘든 등나무와 칡넝쿨의 얽힘인 것처럼 이즈음 산속에서는 칡꽃도 피기 시작한다. 도심과 산속에서 갈등이 서로 꽃을 피울 때쯤, 사과의 고장에서는 사과 꽃이 핀다.


봄날의 고속도로는 꽃길이다

멀리 숲 속의 연하고 진한 나뭇잎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보랏빛 꽃송이와 잡초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쑥부쟁이의 노란 군락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들판의 풍경은 먼 길을 지치지 않게 해 준다.

그런데 동네 초입에 늘어선 사과나무에 꽃들이 엉성하다. 벌써 꽃이 진 걸까? 예전 같으면 벌들의 윙윙거림으로 사과나무 근처에 다가가기가 두려울 만큼 꽃들이 활짝 피곤하였는데 이상하다.

바로 며칠 전 갑자기 기온이 내려간 저온현상으로 새로 돋아난 잎과 꽃들이 냉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울안에 있는 두릅도 가죽나무도 호두나무도 모두 잎이 불에   까맣게 변해버렸다.


산불로, 냉해로, 또는 사람들의 먹거리로 시달림을 받는 식물들에게 봄은 분명 시련의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른 가지 밑동에서 또다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조금 늦었을 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새로운 잎을 피워내는 모습이 대견해 보인다.


이때쯤이면 숲 속에는 산나물이 많이 난다. 고사리와 취나물 다래잎 등, 이제 막 태어 난 연한 순을 자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손맛을 즐긴다. 고사리를 꺾을 때는 재미를 느끼기까지 한다. 오동통한 그것의 줄기를 잡고 살짝 젖히면 툭하고 부러지는 그 느낌이 좋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뿌듯함이 가시기도 전에 눈은 다시 통통하고 연한 갈색 줄기를 찾아 주변 숲을 더듬는다. 언제인가는 무슨 취나물이 이렇게 많으냐며 수북이 따 온 잎들이 대부분 취나물이 아닌 다른 풀잎이어서 버린 후로는 일일이 향기를 맡아봐야 하는 검색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덕분에 쌉쌀한 취나물의 향기를 누구보다도 잘 구별하게 되었다.  


요즘엔 산에서 작물을 채취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어쩌랴 하지만 이 마을에 사시는 분이 경작하는 고사리밭에서 손맛을 볼 수 있었다. 마른 풀잎 사이에 숨어있는 고사리를 발견하면 보물을 찾은 듯 소리부터 지른다.

부지런한 주인이 한 차례  꺾어간 고사리 밭에는 고사리가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보다는 뱀을 주의하라는 밭주인의 말에 더욱 겁이 났다.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을 핑계로 고사리밭에 미련을 남기고 돌아서 왔다.


시골 인심은 아직도 후하다. 밭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네분을 만났다. 비가 올듯하여 버섯을 따려고 숲으로 가는 중이라 한다. 처음으로 버섯을 따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숲 속에 세워진 참나무 기둥에는 버섯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었다. 고사리와 달리 버섯은 줄기가 꽤 질기다. 하지만 요령을 알려준 대로 해보니 손쉽게 나무에서 분리된다. 죽은 참나무 가지조차 생명을 키우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들을 베풀어 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비닐봉지에 수북이 시골 인심이 담긴다. 금방 딴 생 표고버섯에 이렇게 단맛이 들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시골의 저녁밥상이 푸짐하다. 뒤뜰에서 캔 달래 무침. 참나무 아래에서 꺾은 취나물, 기름장에 찍어 먹는 생 표고버섯. 대나무 숲에서 캔 죽순 회와 두릅나물, 이만하면 진수성찬이다. 우리에게 버섯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준 농장 부부를 초대했다. 그들 부부는 이 모든 게 이곳에서 얻은 거냐며 훌륭한 밥상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였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산나물로 차린 밥상은 풍년인데 우리는 시골 저녁의 초연한 풍경을 감상하여 막걸리 잔을 주고받는다.

일 년에 딱 일주일, 사과꽃이 피는 이때쯤 시골의 정취만으로도 나의 시골살이 꿈은 해소되었다.



자연에서 얻은 푸짐한 밥상

매거진의 이전글 절벽 아래엔 푸른 계곡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