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기억

카리에르 드 뤼미에르(빛의 채석장)

by 연희동 김작가


그림 속을 유영해 본 적이 있나요? 커다란 어항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나는 피카소의 그림이 수초처럼 흔들리고 있는 이곳 빛의 채석장에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나의 온몸에 문신처럼 피카소의 그림이 투영된다. 피카소의 그림 안에 내가 있다.


레 보드 프로방스에서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다가 그 옛날 석회암을 캐던 채석장을 만났다. 그동안 프로방스의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느낀 게 있다. 이나라 사람들은 옛사람들의 숨결이 담긴 곳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을 캐던 채석장인 이곳도그대로 방치해 둘리가 없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벙커는 인공의 빛을 활용하여 작품 감상을 하는 창의적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이곳이 바로 ‘카리에르 드 뤼미에르’ 빛의 채석장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전에는 고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고 한다. 전시가 아니라 상영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돌을 캐내고 생긴 채석장의 벽에 빔을 쏘아서 영상으로 그림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명화에 디지털 영상을 접목한 3D라인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기존의 명화에 디지털로 시간의 흐름과 움직임을 넣어 그림을 재 창조하는 아티스트들의 작품전이었다. 고흐의 자화상이 활짝 웃고 있고 모네의 수련이 바람에 날려 흔들렸다. 하지만 이 전시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는 명화의 재 창조란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이곳 빛의 채석장의 전시도 그다지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프랑스 문화라는 게 워낙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자연히 그림과 친해지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예술가의 성지가 있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한 미술관이 있다. 여행을 하는 내내 거의 매일 진품의 명화를 감상하였고 진품이 아니라고 해도 호텔이나 관공서 또는 성당에 장식된 그림들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벅찰 때가 있었다.


더구나 이곳에 오기 전 앙티브의 그리말디 성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눈이 무르게 감상하였으므로 빔으로 쏘아서 보는 그림은 별다른 감흥이 없을 줄 알았다. 다만 여기까지 왔으니 채석장의 내부나 한번 들어가 보자는 마음으로 입장권을 끊었다.


채석장 안은 생각보다 넓고 높았다. 동굴 안처럼 컴컴한 채석장은 바깥 기온보다 훨씬 차갑고 습도도 높다. 떡을 썰어 내듯 잘라 낸 돌 자국이 마치 일부러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이고 돌을 채집하고 생긴 넓은 공간은 처음부터 작품 전시실로 계획하고 만든 건물처럼 예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이곳저곳 벽에서 불빛과 함께 피카소의 작품이 나타난다.

천장과 바닥 그리고 사방에 있는 벽의 돌출 부위마다 같은 그림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그림들, 빛과 그림 거기에 음악까지 합쳐진 예술의 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뜻밖이다. 환상적이었다.

미술관에 소장된 피카소의 작품들이 오늘 이곳에서 마음껏 외출을 즐기는 듯하였다. 벙커라는 특이한 장소에서 음악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다.

벽에 투영된 피카소 작품


채석장의 벽과 천장을 향해 쏘는 빔 프로젝트의 불빛에서 나타나는 그림들은 그렇지 않아도 추상적인 피카소의 그림을 더욱 신비스럽게 채색하고 있었으며 벽의 울퉁불퉁한 질감이 그림에 입체감을 주어서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있는 듯이 보인다.

문득, 빛이 흔들리는 하얀 석회암 벽에서 오래 전의 추억 하나가 함께 흔들거렸 다.


무더운 여름, 더위가 살포시 숨죽인 초 저녁이면 우리 읍내 사람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모두 동네 가운데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하얀 모시 등걸을 입은 어른들은 손에 부채와 자신들이 깔고 앉을 신문지를 한 장씩 들고 있었다.

이날 밤. 동네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초등학교 운동장에 스크린 막을 설치하고 영사기를 돌려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료 영화를 보여 주는 행사를 했다. 아이들은 운동장 맨 앞자리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끔은 함께 따라온 누렁이도 같이 앉아있고는 하였다.

하얀 광목 스크린이 바람에 흔들리면 영화 속 주인공도 함께 흔들리고 주인공 얼굴에 영사기 불빛을 쫓아 날아다니는 하루살이의 그림자가 얼룩이 져도 중간에 필름이 끊기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둠이 내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펄럭이는 광목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와 이곳 빛의 채석장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중첩된다.


레이저 불빛과 함께 피카소의 그림이 사라지고

채석장의 닫혀있던 벙커의 문이 열리면서 또 다른 시간이 후끈 밀려왔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먼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내 어린 시절도 꽤 낭만적이었다는 걸 알게 될 줄을,





빛의 채석장 입구

빛의 채석장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