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마을의 느리게 가는 시간

고르드 마을

by 연희동 김작가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무척 낭만적인 여행이 될 것 같다.

지금껏 발품을 팔며 여행을 했다면 오늘과 내일 이틀간의 여행은 정말 영화 속의 '앤'이 되어보기로 한다. 가이드가 운전하는 차량을 구입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아름다운 마을들을 선정한다. 지금, 그 첫 동네인 고르도로 간다.


나지막한 돌담장과 금방 쟁기질을 마친 듯한 밭이랑이 골을 타고 달리고 있는 이곳은 아득한 옛 날에 내가 보았던 어떤 풍경과 닮았다. 나는 젊은 아버지와 잘 다듬어진 밭들 사이로 난 길을 걸었던 것 같다. 새벽이었고 아침 이슬이 발을 적시었다.


내가 이곳 프로방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이색적인 풍경 속에 어디에선가 본 듯한 과거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보통의 일상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재생되는 것이 좋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프로방스의 북쪽, 고원에 있는 암벽 언덕 꼭대기에 빛바랜 석조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을 반대편에 있는 아슬아슬한 절벽이 이 마을을 전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였다.

차를 세운다. 우리가 사진으로 본 고르도 마을의 전경은 모두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위험 표지판 하나 없는 아찔한 낭떠러지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멀리 고르도 마을의 전경을 찍는다.

위험해 보이는 것은 사진을 찍는 여행객이 아니라 건너편 고르도 마을이다. 산 꼭대기 비탈에 있는 집들이 바위처럼 굴러 내리지 않을까 위태로워 보인다


반대 편 벼랑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과 달리 마을 안은 제법 넓은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는 우뚝 선 병사의 동상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으며 로마인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언덕에 있는 성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돌을 가져다 집을 지었고 그래서인지 마을의 건물들은 모두 돌을 쌓아서 만든 비슷한 집들이었다. 무채색 마을이란 첫 느낌도 아마 똑같은 돌집들 때문인 것 같다.

돌층계를 따라 낮게 지어진 집의 울안이 훤히 보인다. 빨래가 걸려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시골집 같은 정경이다. 까맣게 익은 오디가 수북이 떨어진 돌담장 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졸고 있다. 평화롭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담장 아래로 멀리 고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붉은 언덕이지만 곧 초여름이 되면 라벤더 꽃이 주변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인다고 한다. 보랏빛 라벤더 꽃물결 위에 섬처럼 떠 있는 고르도를 상상해 본다.

아..., 이곳에서 사계절을 맞이해 보고 싶다. 라벤더 꽃을 걷어 낸 가을 들판은 또 어떤 깔일까?

미친바람이라고 부르는 겨울의 미스트랄이 돌담길을 휘젓고 다니는 광경도 만나보고 싶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세낭크 수도원은 이 마을과 유래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근거지였던 이곳을 독일군이 무차별 폭격하려 했으나 세낭크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나서서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이 생긴 이래 한 번도 적에게 마을을 뺏기지 않은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대한 애착심이 무척 강하다고 한다. 마을 앞 광장에 있는 병사의 동상은 아마 마을을 지켜낸 주민들의 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의 영화 '어느 멋진 순간'( A Good Year)은 이곳 북쪽 프로방스의 풍경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화면 가득 펼쳐진 드넓은 포도농장과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 프로방스의 자연과 함께 점점 자연인으로 변해가는 주인공 맥스(러셀 크로우)에게 반해서 지금껏 줄거리를 잊지 않고 있는 영화다.

고르도 마을이 영화의 촬영지였음을 듣고서야 이곳에 오는 동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던 낯익음의 실체가 영상 속의 풍경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과 스케치북을 챙겼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책을 읽고 여행 스케치를 하는 여유로운 여행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하루는 여전히 바빴다. 책과 스케치북은 가방의 무게만 더 할 뿐,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기보다 다음날을 위한 휴식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이곳 고르도 마을에서는 왠지 마음이 여유로웠다.


한 차례 단체 여행객들을 태운 버스가 떠난 뒤 광장은 조용해졌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스케치북을 꺼내서 스케치를 했다.

여행을 떠나온 지도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간다.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처음에 들떴던 것과 달리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끔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와 헤어지듯 가는 곳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 고르도 마을에서는 사색이 더욱 짙어졌다. 무너진 성벽의 돌로 다시 집을 짓고 사는 산 마을은 옛 것을 새로 탄생시켰지만 그대로 옛 것이었다. 이제 더는 아쉬움을 갖지 않기로 한다. 헤어짐이 마지막인 줄 알았던 내가 이곳에서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케치북을 꺼내어 웅크리고 앉아있는 커다란 개 한 마리를 그렸다. 아까부터 누렁이 한 마리가 이곳 광장을 어슬렁거렸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그 개와 친숙해 보였다. 오래된 마을의 느린 시간 속에 늙은 개 한 마리가 앉아있는 그림은 고르드 마을의 이미지와 닮았다.


둥근 성채 앞 나무 그늘아래에서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흑백사진과도 같은 마을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고요하다.


우리가 타고 온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뭉기적 거리다가 해 질 녘 노을을 바라보고 싶었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고르도 마을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마술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프로방스의 태양은 이곳 성채의 긴 그림자 꼬리를 감추려 하지 않고 있다.




양귀비 꽃이 핀 들판

아직 라벤더 꽃이 피지 않은 세낭크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