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붉게 물들이다.

루시옹에서

by 연희동 김작가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만큼 살림살이가 재미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절 나는 주변에 널려있는 황토를 가지고 놀았다. 여자 아이들은 풀잎에 황토 흙을 뿌려 김치를 만들고 황토로 떡을 빚고 황토에 물을 부어서 고추장을 만드는 놀이를 하였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납작하게 빚은 찰흙 위에 토마토소스처럼 황토를 뿌리며 피자 만들기 놀이라도 하련만 먹어본 게 고작 김치와 고추장 같은 것뿐이니 놀이도 다양하지 못했다.

사내아이들은 황토를 둥글게 빚어 공을 굴리며 놀기도 했다. 소꿉놀이를 한 날은 온몸에 붉은 황토물이 들었지만 엄마는 나무라지 않았다. 황토는 우리 일상에서 흙 이상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세마을 루시옹 사람들은 황토로 집을 지었다. 황토를 짓이겨 바르기도 하고 뭉쳐서 벽을 쌓기도 하고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 물감 대신 물에 타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프랑스의 시골마을은 집의 구조만 같을 뿐, 분위기는 모두 다르다, 색깔이 다르고 이야기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다. 돌로 집을 지어 흑백사진과도 같은 마을이 있는가 하면 물길이 마을을 휘돌아 하룻 내 물소리가 그치지 않는 마을이 있다. 이곳 루시옹은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노을색이다. 언덕 위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오면서 바라본 마을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다.


루시옹 마을 전경


황토로 빚은 마을에는 황토색 교회와 황토색 카페. 황토색 갤러리 그리고 황토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처럼 언덕을 타고 차곡차곡 모여 있다.


햇빛이 밝게 비치는 곳은 채도가 높은 붉은색으로, 그늘진 곳은 갈색으로, 연한 베이지에서 붉은 오렌지색에 이르기까지 햇빛을 바라보는 방향과 위치에 따라 채도가 다르게 보이는 붉은 집들을 보는 순간 고등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의 파렛트가 떠올랐다.

도회지에서 오신 미술 선생님의 파렛트는 무척 고급스러웠다. 가지각색의 물감들을 채도가 비슷한 순서대로 짜 놓은 선생님의 파렛트는 범접할 수 없는 물건처럼 보였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주변에 흔한 황토로 집을 짓고, 물에 타서 그림을 그리다가 오크르라는 안료를 발견하였고 지금은 이곳의 황토가 귀한 재료로 대접받는 흙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그냥 갤러리다. 떨어진 무화과 열매를 창틀에 나란히 올려놓았을 뿐인데 액자 같고, 돌담에 그려 놓은 해바라기 우체통은 매일 열어 보고 싶을 만큼 예뻤다. 흙벽 담에 작은 도마뱀 조형물을 달아 놓은 센스도 눈길을 끈다. 땅콩 비스킷 같은 돌담장 길을 걸으면 마치 동화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꾸미지 않은 듯 꾸며놓은 아름다운 동네, 루시옹의 황토마을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빨리 걸어가서 보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신비함이 가득하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유심히 보고 조목조목 걷는다.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는 건 대상에 대한 소유욕, 즉 욕망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아무려면 어때 이렇게 예쁜 동네는 구석구석 다 담아둬야 돼 눈으로 담고 카메라에 담고 마음에도 꼭꼭 담아두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인구 이천 명 이하가 사는 마을을 상대로 ‘작고 예쁜 마을'을 선정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예쁜 마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마을만의 특색을 내세워 개성 있는 마을로 가꾼다. 아름다운 물가가 있거나 특이한 풍경, 성채나 성벽이 있는 마을, 좋은 음식이 있는 마을이 ‘예쁜 마을’의 선정 조건이 된다.

루시옹 마을은 온통 붉은 황토 흙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언덕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어서 매년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들곤 한다


골목을 돌아 나올 때마다 마술처럼 나타나는 아름다운 집. 눈길을 끌 만한 호화 주택도 아니고 집 안에 풀장이 있는 넓은 정원이 있는 것도 아닌 어린 시절 동화책 속에서 본 듯한 집들이 내 상상력을 자극한다.

포도 넝쿨에 가려진 옥탑방의 창문을 열고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날 것 같고 밤이면 붉은 지붕을 더 붉게 비쳐 줄 달빛 지붕 위에서는 요정들이 춤을 출 것만 같다. 청동으로 만든 가로등은 원래 저렇게 황토 흙과 잘 어울렸던 것일까.


마을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의 발코니에서 저녁노을빛에 물든 마을을 바라보았다. 황톳빛과 노을빛에 어울린 루시옹 마을이 온통 붉게 익어가고 있다.


봄날. 황토 담장에 몸을 기대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내 마음에도 붉은 물이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