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파티

by 연희동 김작가


시작이 없었던 것처럼 끝도 없을 줄 알았던 나의 직장생활을 오늘로 마무리 지었다. 어떻게 보면 손님이 없는 상점의 문을 닫았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삼십여 년간 젊음을 바친 일터에는 그동안 함께했던 나의 동지들이 하루 밤 사이에 나보다 더 형편이 나빠진 모습으로 흩어져있다.

공로패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왠지 허전하다. 꽃다발 대신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나 홀로 의식을 치렀다. 쫑파티인 셈이다.

'귀하는 오랜 시간 , 낮이나 밤이나, 아플 때나 힘들 때나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이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내 손으로 나를 토닥인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바람에 날리는 책갈피 소리가 박수소리처럼 들린다.


삼십여 년 전. 아파트 단지의 몇몇 의식 있는 엄마들이 뭉쳐서 아이들의 공부방을 열었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 함께 모여 공부를 하는 것인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바로 아이들의 엄마였다.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기부하는 형식이다.

207호 아줌마는 한자를 가르치고, 305호 아줌마는 수학 공부를 알려 주고, 이도 저도 재능이 없다는 507호 아줌마는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짓기를 가르쳤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과외비를 따로 지출할 필요가 없어서도 좋았지만 아이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느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특히 글짓기를 배우는 아이들은 그 실력을 학교에서 주는 상장으로 종종 인정받았다.

내 아이의 한자 실력이 늘고. 일기를 잘 썼다고 선생님께 칭찬 듣고, 수학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엄마들이 받는 보수였다. 동네에서 아이들은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글짓기 선생님이 된 것은...,


작은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 교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때마침 논술영역이 대학시험에 영입되면서 학교는 물론 학부모들도 독서에 열을 올렸다. 논술시험의 물살은 쓰나미처럼 온 나라를 휩쓸었고 하루아침에 대치동에는 영어나 수학 학원보다 논술학원이 줄줄이 생겼다. 글 좀 씁네 하는 사람들은 논술교사로 초빙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입 소문이 최고다. 중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독서지도를 하는 나에 대한 소문이 학부모들 사이에 퍼지게 되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간간히 있었다. 나는 교육청에 당당히 내 이름을 건 문학교실을 허가받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흔히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내가 문학교실을 운영하는 곳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단지 내에 나란히 있는 동네였다. 나의 학생들은 어린 초등학생에서 부터 사춘기를 맞이하는 중학생과 대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고등학생까지 다양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콩나물을 기르는 것과도 같았다. 콩에 물을 주면 물은 그대로 빠져버리지만 어느덧 뿌리가 다 자란 콩나물이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듯이 아이들은 매일 자라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너무 다급해하지 않고 열심히 보살피면 아이의 글솜씨가 어느 순간 향상되어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칭찬보다 더 좋은 학습은 없었다.


중학생들은 엄마하고 갈등이 가장 심한 시기다. 무조건 미움받는 엄마의 심정을 대신해주는 일이 수업의 반을 차지한다.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4월에 부는 바람처럼 요지부동이다. 하룻밤만 선생님 집에서 재워달라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한 밤중에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의 보호자로 불려 간 적도 있다. 이런 말썽꾸러기들도 사랑으로 보듬으면 제 자리를 찾는다.


고등학생들의 논술 수업은 진지하다. 밤 열 두시가 넘어서야 마치는 수업이지만 누구 하나 졸거나 한 눈 파는 아이들이 없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하지만 첫눈이 오는 날이나 특히 월드컵 축구를 하는 날에도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안겨 줄 때는 부모님 만큼 나도 기뻤다.


그동안 나의 일터였던 교실에는 임자 잃은 학습지들이 책꽂이에 비뚤비뚤 꽂혀 있고 빈 통 안에는 몽당연필이 수북하다. 몽당연필은 나의 소중한 기념품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는 연필을 사용하도록 했다. 연필을 손에 쥐고 힘을 주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예쁜 글씨를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글씨체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 조금만 힘을 줘도 툭툭 부러지는 샤프펜슬을 사용하면 글씨도 약하고 가늘게 된다. 저 몽당연필의 주인 중에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 엄마가 된 학생의 것도 있다. 몽당연필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책상 위에서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본다. 유난히 똑똑하거나 유난히 말썽을 부린 아이들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준영아, 오늘도 어딘가에 이력서를 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너에게는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나에게 진로상담을 하러 왔을 때 나는 취업의 문이 좀 더 넓은 사회복지학과를 추천해 주었지. 그때 네가 원하는 대로 역사학과를 갔더라면 지금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수많은 청년 실업자 중에 네가 끼어 있다는 게 어쩌면 내 탓인 거 같기도 하단다. 하루빨리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구나,”


”상아야, 중학교 2학년 무렵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너에게 내린 나의 처방은 “친구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로 복수해 주자”였지, 그 후 혼자서 호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을 때 힘들 적마다 내가 한 말을 생각하며 견뎌냈다고 한 네가 생각난다. 사실은 너를 위로한답시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나서 나는 많이 후회를 했단다. 너의 마음이 사나워질까 봐 두려웠던 거지, 나의 걱정과 달리 그곳에서 치의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된 너를 보고 그 때야 마음이 놓였단다.


“공영방송 TV 화면에서 자주 보는 경진이도 생각이 난다. 네가 사는 집과 내가 사는 곳은 거리가 꽤 멀었지만 한 번도 게으름 피우는 일없이 열심히 수업을 받으러 오던 여학생 경진이,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수집한 자료들을 가방 한가득 싸들고 왔던 너는 아마 그때부터 이미 기자의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구나, 오늘 아침에도 멀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식을 전하는 너를 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에게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었단다.”


”도현아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내 말썽을 부리더니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와 멀어졌지, 친구들도 너의 소식은 나에게 들려주기를 꺼렸단다. 얼마 전 동네 패밀리 식당에서 너를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를 뻔했으나 팔뚝에 그려진 문신을 보고 주춤했단다. 그 보다는 나를 외면하는 너의 눈을 먼저 본거야, 얼마나 아팠을까..., 양팔 가득 그려진 문신을 보고 한동안 가슴이 멍했단다.”


아이들이 공부하던 책상 위에 수많은 이름들이 아른거린다. 강연이..., 유진이..., 은주...., 성하..., 어진이..., 귀여운 선우...,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소중하다.


예진이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예진이는 나의 마지막 학생이다. 공부도 잘하지만 얼굴도 예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가끔

"예진이가 서울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아마 김태희 다음으로 예쁜 여학생이 될 걸?"

하고 부추기면,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것처럼 눈을 흘기며 얼굴을 붉히던 아이였다.

대학교에 가면 논술 말고 소설을 쓰러 선생님께 오겠다던 아이가 어느 날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수업을 받지 못하겠어요"

그동안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버지가 일을 쉬고 계신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마지막 한 아이까지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는 처음의 내 신조는 지켜졌다.

어젯밤 예진 엄마의 정중한 전화를 끝으로 그동안 나의 직장생활이 마무리되었다. 빈 교실에는 책장에 꽂힌 책들과 모아놓은 몽당연필, 아직 지우지 않고 있는 칠판의 글씨들이 내가 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봄에 새 학기가 되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 보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나도 쉴 때가 되었다. 그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간판도 없이 허가증 하나로 시작한 ‘김정숙 문학교실’의 명패를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