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다면

초보 노인 입문기

by 연희동 김작가




올봄 내 생일날, 나는 나라에서 주는 카드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쉰 살이 갓 넘었을 때 동네 병원의 대기실에서 내 앞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가 “ 할미 “라고 불렀을 때 나보다 더 당황한 건 아기 엄마였다. “죄송합니다. 저의 시어머님과 모습이 비슷하셔서 애기가 할머니인 줄 알았나 봐요 죄송합니다” 거듭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아기 엄마에게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아직 할머니라는 호칭은 당치도 않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친구의 첫 손녀를 가운데 앉히고 우리는 속 보이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가야 나는 이모야?할머니야?”

눈을 동 그렇게 뜨고 조물거리는 아가의 입에서 튀어나올 한마디를 듣기 위해 우리 모두는 가슴을 졸였다.

“이모야”
"우와!”

친구는 서슴없이 지갑에서 파란 배춧잎을 꺼내 아가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뭐라고 내 차례가 되니까 가슴이 뛴다.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던 아가가 이번엔 주저하지도 않고
“이모야”라고 한다.

나는 알았다. 아가는 이미 이모와 배춧잎의 상관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줄 알면서도 이모들은 좋아 죽겠고 할머니로 불린

친구들은 “너희들은 좋겠다 젊고 이뻐서”라며 입을 삐죽거린다. 여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아무리 공들여 젊음을 유지하려 해도 예순다섯 살 생일이 지나면 나라에서 어림없는 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카드 한 장이 날아온다.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 , 이게 내 지갑 안에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노인이 된다. 생일 선물치 곤 참 고약한 선물이다.

그동안 지갑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교통카드를 오늘 드디어 사용해 보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친구들과 만남을 갖는 장소는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전철역 주변이었다. 나는 2호선 전철을 타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홍대역으로 갔다. 지하철을 처음 타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마음이 비장한 걸까?

개찰구 앞에 서는 순간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것부터 서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노인교통카드를 사용하는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것만 같다. 굽 높은 부츠를 신은 나의 차림새와 어르신 교통카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 아직 노인이 아닌데 노인 카드를 사용한다며 나를 붙잡을 것만 같다. 누가 볼세라 재빠르게 카드를 승차 태그 하는 곳에 얹어 놓았다. 그 순간 갑자기 “ 삐릿”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뒤이어 “이 어르신 교통카드는 처음 사용하는...,으로 시작되는 멘트가 들렸다. 이게 뭔 일이람 만천하에 내 나이는 예순다섯 살이에요 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당황해서 뒷 말은 다 듣지도 못했지만 아마 처음 사용할 때는 역무원에게 신고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남편은 삼 년 전에 이미 어르신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남편이 알려 준 교통카드 사용방법 중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나는 황당하고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모임에 나온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어르신 교통카드에 관해 슬며시 물어보았다. 한 친구는 어차피 버스로 환승도 안 되는 그깟 카드 허울 좋은 생색 아니냐며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한 친구는 이 나이에 땅 파 봐라 십원 한 장 나오냐며 오늘도 어르신 카드를 사용하여 이곳까지 왔노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괜찮았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아침처럼 서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여유 있게 카드를 사용하였다.

요즘 들어 젊은이들보다 노년의 삶을 담은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일흔일곱 살 할아버지가 TV에 나왔다. 손녀 같은 가수 손담비와 함께 “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를 부르며 어깨춤을 춘다. 엉덩이도 리드미컬하게 흔들어 댄다. 음정도 박자도 틀리지만 할아버지의 노래는 정말 멋들어졌다.

TV를 보고 있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무엇일까? 할아버지의 어떤 매력에 사람들은 이끌리는 걸까? 전국 노래자랑에 나온 할아버지의 동영상 실검수가 하룻밤 사이에 10만 뷰를 넘었다고 한다. 노인이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인기를 끈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할아버지는 무대에서 전혀 꾸밈이 없었다. 만약 노래처럼 젊게 보이려고 청바지에 남방 셔쓰를 허리에 질끈 묶고 출연했더라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노인정에서만날 수 있는 수수한 노인의 모습에서 진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세월이 지나면 연륜이 쌓이지만 노인의 마음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마음이 나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나이 들어가는데 마음만 젊다면 어디선가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젊음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더욱 건강한 삶이 될 것 같다.

매일 아침 아홉 시면 우리 집 앞에 봉고차 한 대가 머문다.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통학차다. 오늘 아침에도 자신의 얼굴과 꼭 닮은 손자의 손을 잡고 통학차를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나와 서 있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쉬지 않고 조잘거린다.

“할아버지 저 고양이는 누구네 꺼야?”
“응 우리 동네꺼지”

“그렇구나...,


동네 주민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길고양이와,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아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다. 아이처럼 순수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이 사는 동안 몇 단계의 시기를 겪는다. 나이의 틀에 맞게 정해진 이 시기에 각자 할 일들이 있다. 유아기에는 잘 먹고 잠 잘 자는 일이, 아동기에는 천진난만하게 잘 뛰어노는 일이 청년기에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일이, 중 장년기에는 자신과 후손을 관리하는 일이 있다. 노년기는 이 모든 시기를 무사히 겪어 낸 인생의 베테랑들이 겪는 마지막 시기다. 이 시기에는 건강을 챙기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사는 일이 나이의 틀에 맞게 사는 모습이다.


어쨌든 오늘 나는 어르신 신고식을 무사히 치렀다. 나는 어떤 노인이 될까? 나에게 묻는다. 정치 이야기에 침 튀기며 종주먹 휘두르는 노인은 되지 말자. 의자에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노인은 되지 말자. 아이처럼 살되 아이는 되지 말자. 그러고 보니 어르신 교통카드는 참된 어른이 되어달라는 정중한 부탁의 선물이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