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린 날

by 연희동 김작가

헬스장에 갈 때만 해도 눈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자 소담스러운 눈송이가 펑펑 내리고 있고 그새 주변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올 들어 처음 오는 눈, 첫눈이다.


집으로 오는 길엔 어찌할 수 없이 온몸으로 첫눈을 맞는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이 찍히기 무섭게 내리는 눈은 뒤따라 오는 내 발자국을 지운다.

집에 도착하여 보니 내가 눈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학기말 고사를 마치고 단체로 영화관람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본 영화의 줄거리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들 앞에 펼쳐진 풍경과 그걸 바라보는 소녀들의 탄성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우리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이 첫눈이 내린 것이다. 영화관 앞, 작은 집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있는 풍경이라니... 방금 전까지 영화를 보며 울고 웃던 소녀들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새 영화 속 이야기는 잊은 듯했다. 첫눈이 온 날, 우리들은 친구들과 함께 모두들 집이 아닌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떠났다.


눈발하나 흩날림 없이 이렇게 첫눈이 오는 날은 내 추억도 차곡차곡 쌓인다.


오늘 첫눈을 맞으며 집으로 오면서 수십 년 전, 소녀적 감성이 아련해졌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이 내리지만 첫눈은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헬스장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채 300미터가 안된다. 그 길을 오는 동안 나는 소녀였다. 하지만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실로 귀환한 나는 내 집 앞을 지나갈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염려되었다. 이 정도로 눈이 온다면 분명 내일 아침뉴스에는 폭설사고와 낙상이라는 단어가 화제가 될 것이다.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우리 아이들이 집으로 올 경우 눈길에서 운전하기가 힘들지 않게 해야 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주민센터에서는 골목의 군데군데에 염화 캴숨을 비치해 두었다.

나는 집 앞 골목길에 염화칼슘을 뿌리기 시작했다. 첫눈이 녹는다. 소녀적 감성도 녹아버렸다.


어린 시절 눈을 좋아하는 우리들과 달리 어른들은 눈을 성가시게 생각했다. 썰매를 타며 즐기던 빙판길에 연탄재를 뿌리던 어른들이 참 윈망스러웠는데 내가 지금 그런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동네는 눈이 와도 골목으로 뛰쳐나와서 눈을 즐기는 아이들이 없다.

이웃집에서 눈을 쓸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어른들의 걱정은 첫눈도 덮어주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베란다에 쌓인 눈으로 작은 눈토끼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족 카톡방에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문자를 보낸다.


해마다 첫눈이 오는 날은 나는 잠시 소녀였다가 다시 어른이 되는 마법에 걸린다


녹자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