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린 강아지의 병상일지
아직은 이별을 할 때가 아니다
만약에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밤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층에서 울어대는 그놈을 잠재우고 내려왔더니 내 잠이 확 달아났다. 뭐랄까 지금 내 심정을 글로나 써 볼까 하고 컴퓨터를 켜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문학상 시상식에서나 듣던 수상소감이 오늘 밤 나에게 전해질 줄 몰랐다. 행복하기까지는 아니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침이 올 때까지 눈이든 가슴이든 쥐어짜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오늘 밤도(거의 일 년 동안이나) 한밤중에 일어나야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 갈등도 함께 겪는다.
교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교감을 한다. 오감 중 어느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교감은 가능하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지만 눈빛만으로 반려견 세찌와 나는 교감한다. 씻어줘... 목말라... 배고파... 나 좀 뒤척여 줘... 감정의 교류란 때론 슬픔도 함께 나눠 가져야 하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아프다.
17년 전. 친구가 하얀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왔다.
한 동네에 사는 스피츠인데 엄마가 바람이 나서 낳은 아이라서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강아지는 갈색 점박이가 있는 바둑이와 털이 새하얀 스피츠를 적당히 믹스해 놓은 새로운 종의 강아지였다. 몸 전체에 부드러운 털이 복실하게 감싸서 실제보다 커 보이지만 애완견이라고 하기엔 조금 크고 그렇다고 중형견에는 못 미치는 작은 체구여서 우리는 그냥 집 안에서 키우기로 했다.
생명이 있는 것을 집 안으로 들일 때는 식구들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지금에야 뼈저리게 느끼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동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랑거리며 걸어 다니는 하얀 털 뭉치에 금방 반해버렸다.
세찌는 그렇게 우리와 한가족이 되었다. 17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세찌는 17살. 사람의 나이로는 90살이 넘었다.
우리 집 셋째 아이라는 뜻으로 세찌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호적에 올리고 싶을 만큼 귀여운 녀석이었다.
집에 새 식구가 생기면서 가족끼리 공동의 대화가 생기고 각자 자기 방에서 열중하던 식구들이 거실로 모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안 분위기가 세찌로 인해 훨씬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식구들은 강아지를 이뻐해 주는 것 외에 보살피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키우자고 했으므로 강아지의 부양도 당연히 내가 해야 될 것으로 식구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나 역시 모든 것을 스스로 떠맡았다. 그런 일조차 즐거웠다. 적어도 세찌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들을(나는 일 년 후 또 한 마리의 강아지를 입양하였다) 먹이고 치우고 씻기는 일들이 귀찮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작년 오월. 남편과 함께 한 달간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세찌는 유모차에 실려 나를 마중 나왔다.
내가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유모차를 타야 할 만큼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갑자기 제 곁을 훌쩍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상실감이 세찌를 아프게 만든 것 같았다.
유난히 큰 소리를 싫어해서 한여름 천둥소리가 울리면 내 치마 밑으로 숨던 녀석이 어느 날 청소기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청각이 사라진 것이다. 이층 층계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던 튼튼한 다리였는데 자신이 늘 앉아있곤 하던 소파 위를 한 번에 뛰어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관절이 약해졌다고 한다. 눈동자가 희미해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백내장이었다. 밥을 삼키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졌다. 어금니가 빠져버린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변해가는 세찌를 보면서 나는 노쇠해져 가는 인간의 모습을 축약해서 보는 것 같았다.
치매라고요?
처음 우리 집에 온날부터 지금까지 배변 실수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실에 똥을 누었다. 바로 걷지 못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빙빙 도는 세찌에게 내려진 병명은 치매였다. 선비처럼 조용하고 품위 있던 성품은 사라지고 대신 고함을 질러서 의사 표현을 한다. 전보다 왕성해진 건 식욕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우는 세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있다.
세찌가 수놈으로 처음 이상한 행동을 보였을 때 나는 병원에서 중성화 수술을 시켰다. 동물의 본능을 죽이고 평생을 착한 고양이처럼 살았던 세찌는 지금 잊힌 성욕 대신 식욕을 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뿌연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기가 두려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에는 극복이라는 희망적인 단어가 있지만 편안한 죽음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절망감밖에 없다. 사람들은 세찌보다 내 건강을 더 염려하여 안락사를 권유한다. 안락사라는 말이 싫어서 어젯밤에도 밤잠을 설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한 밤중에 짖어대는 녀석의 혈관에 나는 수없이 많은 생각의 바늘을 꽂았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어둠과 함께 두려운 생각이 사라지고 사는 날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는다. 때론 의무감도 사랑이겠지...,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세찌의 숨소리를 확인하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아직 이별이란 말은 저 먼 나라의 말처럼 들린다.
귀여운 녀석들의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