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죽음만한 장신구는 없다
한 아주머니 손님이 말을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세요 하고 말씀해 주셨다. 그 아가씨가 종일 죽음과 함께였다는 걸 알면 깜짝 놀라겠지. 오늘 나의 차분함은 죽음에서 나왔다. 오늘 나는 죽음을 손목시계처럼, 귀걸이처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기도 했다. 인간에게 죽음만 한 장신구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이렇게 자주, 종일 생각해도 될까 그런 생각도 든다. 생각일 뿐이니까 괜찮나 아니면 나쁜가. 혹 위험한가. 일찍 죽든 나이 들어 죽든 죽는다. 일찍 죽거나 영원히 살거나 아님. 다 죽는다. 나 진짜 문제 있나? 하지만 밥과 스팸이 맛있는 걸로 봐선 괜찮은 거 같다.
어제는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죽었고 죽었다는 건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누워있는 이 침대에 누운 적이 있다. 내게 말을 붙이려고 걸터 앉은 적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이 침대에서 같이 잔 적은 없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여전히 모른 채 쓰고 있는 것 같다. 죽었다는 건 없다는 것. 내가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오늘은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살 충동이나 우울증과는 몇 미터 떨어져 있다. 그것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분대로 살면 일주일도 못 살 거다. 할머니는 죽고 싶은 순간이 무진장 많았을 거다. 그래도 할머니는 끝까지 살다 갔다.
한편으론 너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삶이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일까? 아마 그 사이에서 계속 움직일 테지. 따지자면 나는 의욕적일 때가 많아서 기운이 없거나 기운을 낼 마음이 안 들 때 더 어둡게 생각하는 듯하다. 진짜 죽음 앞에 설 때면 내가 종종 삶에 대해 느끼는 심드렁함이 황당무계하다고 느낀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그냥 살아있을 줄 안다. 개가 자꾸 나한테 와서 치댔다. 개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가만히 심장소리를 들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오자 동생이 시원한 비타 500을 줬다. 이런 걸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란. 인간이란. 삶이란.
스타벅스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슬프고 괴롭게 하는 문제들과 해결책을 적었다. 생각보다 아직 더 해볼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나를 살리는 시간. 이제 죽음은 내 귀가 아니라 도로 건너편에 있다.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