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데까지 사는 거니까

희망은 내가 죽은 뒤에나 죽는다

by 이아침

손님이 없다. 빙수철이 끝났다고 해도, 대목을 탄다고 해도. 해도 해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이주째다. 올여름의 성황은 한여름 밤의 꿈같다.


근 이주째 핸드폰을 안 했다. 가십이라든지 릴스나 쇼츠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뜻. 뇌가 깨끗해서 좋다. 잠깐 네이버 첫 화면을 보거나 인스타 돋보기를 보면 세상만사가 왈칵왈칵 흘러 들어온다. 나는 그게 싫다. 내가 나는 솔로 몇 기 옥순의 결혼정보업체 점수를 보는 게.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보는 것은 괜찮다. 원한 적도 없는 것을 보는 게 싫다.


오늘은 한가한 나머지 몇 개 봤다. 첫 번째는 루게릭병을 앓던 유튜버의 부고 소식이었다. 두 번째는 백혈병 투병 중임을 밝힌 한 유명 댄서의 소식이었다. 세 번째는 무안 항공기 추락 사고를 수습한 소방대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삶에 대한 생각이 된다.


우리 할머니는 80살까지 살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한평생 시달렸다. 열여덟부터 여든까지. 할머니의 소원은 할아버지가 자기보다 단 하루라도 빨리 죽는 거였다. 평생을 술 마시고 춤추며 산 할아버지. 여자 없이 못 사는 할아버지. 빨간 바지를 입고 짝퉁 시계를 차고 금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할아버지. 욕도 잘 하고 울기도 잘 우는 할아버지. 자식들이 치를 떠는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얇다. 이게 다다. 그의 머릿속은 돈, 술, 춤, 걸, 폼뿐. 나는 할아버지를 보며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는 짱짱하다. 아침부터 소주를 글라스로 마신다.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다. 지독히 모르는 사람.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아프자 놀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행기에 태우고 달달달달 밀면서 큰 길가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할아버지가 자기를 안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느꼈다.


할머니는 온갖 꼴을 보며 할아버지를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저 인간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글렀다고 말했다. 억 겹의 시멘트를 덧바른 곳에도 희망이 피어난다. 하루살이 희망이.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희망은 때로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다 포기했다고 말한 뒤에도 숨어있는 희망. 내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는 희망. 희망은 내가 죽은 뒤에나 죽는다.


아무튼 간에 할머니는 평생을 편도체 활성화 상태로 살았다. 투쟁 도피 상태로 살았다. 그리고 여든에 죽었다. 갑자기 죽었다. 나는 할머니를 자주 생각한다. 우리는 베프였으니까. 매일 생각한다기보다 매일 떠오른다. 할머니가 앉아있던 벤치를 보면서, 가자미구이를 먹다가. 내 개는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난감을 물어뜯는 개를 쓰다듬는다.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 그럴 때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이제 삶이 뭔지 알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으니까. 나는 호텔 욕조에 러쉬 입욕제를 풀면서, 화려한 색과 거품을 보면서, 할머니에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한다.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 텐데. 그런 순간을 더 많이 줬더라면. 아주 큰 꽃다발을 안겨 줬더라면. 어떤 일을 단 한 번이지만 인생에 분명한 점을 찍는다. 지금 내 머리로는 잘 사는 건 그런 순간을 많이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그냥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그런 순간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오래오래 살 수도 있고, 요절도 호상도 아닌 어중간한 때에 죽을 수도 있다. 사는 데까지 사는 거다. 나의 불안과 괴로움은 내 터전을 조금만 벗어나면 사소하다. 거의 복처럼 보인다. 장사가 안 된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저녁 맛있게 먹고 또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감사히 살기로. 생계는 생계고, 눈앞의 소고기는 소고기다. 재난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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