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잡초처럼 자랐다. 재난 속에서도.
롯데시네마에 오면 어릴 적 아빠와 심야 영화를 보곤 했던 게 떠오른다. 아빠는 종종 밤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나를 불러냈다. 동생들이 어려서 엄마가 집에 있고 아빠 혼자 밤늦도록 일하던 때. 나는 동생들은 자고 아빠와 단둘이 데이트 한다는 게 좋았다. 간지러운 기분. 전화기 줄처럼 나도 배배 꼬였다. 내가 아파트 일 층으로 내려가면 아빠가 차로 데리러 왔다.
함께 <반헬싱>이라는 외국 영화를 봤던 것, 스크린에서는 뱀파이어가 날아다니고 아빠는 옆에서 자던 게 생각난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영화를 봤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빠가 나를 불러냈던 날은 아마 손님이 더럽게 없던 날일 거다. 또 어린 딸을 뱀파이어와 두고 잠들 만큼 피곤했을 거다. 혼자 차에서 자거나 쉬지 않고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준 게 새삼 고맙다.
그로부터 2년 뒤, 내가 15살이고 아빠는 45살일 때 아빠는 백혈병에 걸린다. 내가 12살 무렵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기울기 시작할 때. 엄마 아빠는 죽겠다, 죽겠다 했을 거다. 2년 뒤 진짜 죽네 사네 하는 때가 올 줄 모르고. 더 어두운 상황이 되면 그전의 어둠은 환하게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이라는 밴타 블랙 옆에 선 다른 검은색처럼.
아파트를 팔고 다섯 식구가 작은 빌라에, 다시 아파트 월세로. 엄마 아빠는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기겠다는 생각은 사치고, 몸을 낮추고 팔을 들어 가드를 올린 채 한발 한발 겨우 뻗었을 뿐일까? 사기를 잃어도 멈출 수 없으니. 생존에 관해서라면 나는 엄마 아빠를 깨끗이 존경한다.
그 시절은 어렵고 힘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아빠와 심야영화를 봤던 거나 아빠가 아래층 패밀리 레스토랑에 우리를 데리고 갔던 것, 엄마랑 KFC에서 비스킷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던 것, 농협 ATM기에 세뱃돈을 넣었던 것, 지하 하나로 마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베이컨과 핫케이크 믹스와 시럽을 샀던 것, 고등학교 때 봉고를 기다리고 있으면 꼭대기 층 베란다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어 주던 것 등. 그 시절에도 행복이 있었다. 앞이 깜깜하던 시절로 퉁치곤 하는 그 시절에도, 언제나 예쁜 우리 엄마에게서도 가난이 티 나는 그 시절에도, 행복은 잡초처럼 자랐다. 재난 속에서도.
나와 동생들은 맞은편 아파트 상가에 있는 공부방을 다녔다. 그 공부방 원장 선생님은 아빠가 아팠을 때 학원비를 안 받았다. 채점을 받으러 선생님 자리로 가면 선생님이 종이에 필담으로 아빠가 괜찮은지 물었다. 모나미 볼펜 똥과 선생님에게서 나던 음식 냄새. 선생님은 우리 가게와 카페에도 오셨다. 우리 집이 완전히 일어선 것을 놀라워하시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해 주셨다.
아빠는 엄마 말 잘 듣고 동생들 잘 챙기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금방 가겠다 했었다. 그 말을 믿을 만큼 어리진 않았다. 아무튼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살아있다. 어제 샤브올데이도 사줬다. 우리는 잘 산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때로 아빠를 미워하는데 사랑의 역사에 비하면 그 미움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20년 전에도 내게 영화를 보여줬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