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삶이란 코딱지만하다
망고 스프레드를 만들었다. 아웃백에서 부시맨 브레드에 발라 먹는 그 버터. 나는 그걸 아주 좋아한다. 망고 스프레드를 여러 개 받아와서 빵에 잔뜩 발라 먹으면 행복하다. 카페에서 브라운 브레드와 망고 스프레드를 팔아 볼까 하고 만들었다. 아는 맛이 무서운 거니까.
베이킹 아니 요리 레시피가 으레 그렇듯 간단해 보였다. 망고 주스를 졸이고 버터와 섞는다. 그게 다였다. 사이사이 설탕과 연유, 소금, 레몬즙이 조금 들어간다. 15분 소요라고 한 것 같은데 망고 주스를 30분 동안 졸여야 했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15분 정도 졸인 것 같다. 체감은 더 길었다. 불이 세면 망고 향이 날아가서 중약불로 해야 했다.
졸인 망고 주스를 한 김 식힌 후 버터와 섞는다. 이게 복병이었다. 망고 주스 졸인 게 200ml가 넘는데 티스푼으로 조금씩 넣어 버터와 섞으라고 했다. 왜? 어느 세월에? 성질머리 대로 부으면(그래 봐야 졸졸 정도) 바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주스가 버터에 스미지 않고 겉돈다. 30분 넘게 조금 붓고 섞기를 반복했다. 숟가락을 쥔 손이 아팠다. 주스를 많이 넣으면 잘 섞이지 않아서 오래 섞어야 한다. 주스를 찔끔 넣으면 잘 섞이지만 속이 터진다. 결국 시간은 또이또이다. 알면서 나는 한 방울씩 넣지 못한다. 졸졸 넣는다. 주스가 겉돌고 미끄덩거려서 섞기 힘들다. 손이 저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나란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주스를 최소한으로 졸였다. 정석대로 라면 400ml가 120ml 정도가 될 정도로 졸여야 한다. 그렇게 했으면 버터와 섞어야 하는 주스 양이 내가 한 양의 반 밖에 안 된다. 편하게 냄비에 졸이면 됐는데 조금만 졸여서 섞어야 할 주스 양이 두 배가 된 거다. 앞에서 줄인(줄였다고 생각한) 시간은 뒤에서 늘었다.
거의 마지막까지 나는 '티스푼으로 한 스푼씩 넣으며 섞는다'를 지키지 않았다. 쪼르륵 따르고 한참 섞었다. 새침데기 버터는 왈칵 쳐들어 오는 주스를 받아주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알아도, 심지어 경험적으로 알아도 내 쪼대로 하게 된다. 아, 나란. 인간이란.
다 섞은 뒤에도 버터 향만 강해서 과연 이게 망고 스프레드가 될까 싶었다. 잠시 냉장고에 넣어뒀다 먹어 보니 의외로 망고 맛과 향이 싹 올라오고 꽤 맛있었다.
그러던 중 장애인 손님이 왔다. 젊은 남자. 사시가 심하고 입과 손이 뒤틀려 있었다. 목소리도 독특했다. 튀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발랄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간판이 잘 안 보여서 찾는 게 어려웠다고, 간판이 잘 보이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입구 쪽에 있는 그를 보고 나갔다. 그는 자기처럼 헤매는 사람인 줄 알고 여기 맞는데, 하고 말했다. 그는 상냥했다. 손톱에는 알록달록 원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내가 커피를 주자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자 언니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갔다. 내가 아는 삶이란 코딱지만 하다.
밤에는 달렸다. 김주환 교수의 유튜브를 들으며. 사는 걸 즐기라고 했다.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인데 네가 지금 즐길 때야? 하는 생각이 피어올라도. 그래, 이것도 문제가 저것도 문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고 즐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재난 속의 행복. 무조건적인 행복. 작가가 되면, 돈을 많이 벌면, 짝을 만나면 같은 행복의 조건들은 불행의 조건들이라고 했다.
선호를 가지되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많은 부분이 운이라는 것을 알라고 했다. 쓰고 나면 뻔한 말 같다. 오해 사게 옮기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솜씨 부족일 뿐. 여러 개 들어 보면 생각의 지붕이 열린다. 궁극적인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행복과 쾌락을 혼동하지 말자. 평일에는 죽을 것 같고 주말에는 살 것 같은 삶, 물고문 같은 삶을 살면 안 된다.
달리다가 손을 뻗어 나뭇잎을 톡 친다. 미치게 재밌지 않아도 즐겨 본다. 가을밤도, 숨도, 몸도 느껴 본다. 빠른 페이스는 아니지만 3km를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