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속 이야기
깜박하는 건망증이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길 줄 몰랐다. 수시로 잊어먹고 또 생각나곤 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아침밥 먹고 간식 타임엔 커피랑 말랑말랑한 쑥 가래떡을 맘껏 먹었다. 텃밭에 심어 둔 마늘이랑 양파를 캐러 가자고는 했지만 일보다는 함께 놀고 싶은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마당에 풀도 뽑고 빈 땅에는 여름 장마에 강하다는 담배상추씨도 뿌리고 대파 씨도 뿌려놓고 잡초를 키우느니 고들빼기 씨도 뿌린다. 이러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간다.
이제는 다시 분주 복잡한 도심 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으니 남은 반찬이랑 밥으로 비벼 먹는 것은 어떨지? 깔끔하게 끝내고 싶은 마음에 동의를 구한다. 모두 배부르다면서도 오케이 승낙이다. 그러고 보니 밥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즉석밥 하나를 살짝 뜯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여러 가지 나물과 남은 반찬에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한 양푼이 비빈다. 계란 프라이에 깨소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는 사이에 몇 번이나 빽빽거리며 밥이 다 데워졌음을 알려왔지만 하던 일 마무리하고 본다는 것이 그만 4인분 충분한 양이라 생각을 못하고 깜박 잊었다.
점심을 먹고 이것저것 짐을 다 챙겨 3시간을 달려왔는데 앗차차, 어쩌지 그 밥! 어쩌지, 어쩌지 해봐도 별 방법이 없다. 다음 갈 때까지 방법이 없다. 요즘 날씨에 하루 이틀 지나면 곰팡이가 난리 날 텐데 곰팡이 뒤집어쓴 전자레인지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2~3주는 되어야 갈 것 같으니 아예 생각을 하지 말자. 주말 이틀 주어지는 시간에 왕복 6시간을 길에서 보내며 매주 다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도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에 집중호우가 갈 길을 막는다.
한 달 만에 대문 앞에 서니 말없는 집이지만 미안하다. 현관문을 열자 빈집 냄새가 화끈하게 우리를 반긴다. 얌전히 주인을 맞는 거실과는 인사도 없이 주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 달 동안 잊고 살았던 그 일을 기억해 내고는 대책도 없이 곰팡이들을 만나려 한다. 전자레인지를 확 열어본다. 어우 왜 이리 깨끗하다니! 믿기 어려운 이 상황 곰팡이가 하나도 없다.
얼른 밥을 꺼내서 양손으로 들고 눈으로 확인한다. 푸르뎅뎅하던지 거무티티한 것이 정상일 텐데 하얗다. 쌀알이 그대로 살아있다. 겉이 약간 마른 듯 하기는 해도 윤기도 잃지 않았다. 그 참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코로 킁킁 거리며 시큼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리 맡아봐도 시큼하거나 쿰쿰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쌀밥 냄새가 난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손으로 만져보고 밥을 뒤집어 밑바닥을 봐도 촉촉하지만 미끄덩 거리거나 끈적림 없이 자연스럽다. 시각, 후각, 촉감 어디를 봐도 변질되지 않았다. 괜찮음으로 평가한 내 몸이 정상이라면 즉석밥도 정상이다.
어째 이럴 수가 있지. 정말 예상 밖이다. 밥 없이는 못 사는 수십 년 밥순이도 이해 못 할 밥이다. 이삼일이면 변해버리는 밥이 정상인줄 알았는데 한 달 동안 변하지 않는 밥이 있다니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보통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즉석밥 너의 정체가 뭐니? 즉석밥의 모든 원리가 궁금하다. 이제까지 밥으로 살아온 인간이 이해 못 할 밥을 앞에 두고 정신이 혼미하다. 진공 포장된 상태도 아니고 뜯어진 채로 한 달간 방치되어 있었는데 말짱하다니. 공기와 직접 만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뚜껑을 뜯어서 싱크대 위에 이틀을 방치해 두었다. 여전히 모양 냄새 품질 아무 이상 없지만 도저히 그 밥을 그대로 먹을 수는 없다.
거름이나 되라고 밭에 뿌려뒀더니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쪼아 먹으며 짹짹거린다. 밥을 몇 달씩 유통기한을 두고 먹을 수 있는 신기한 기술력에 실온에서도 변질되지 않는 밥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다. 바쁜 세상이라 그 누구라도 편리해서 더 좋아하는 즉석밥! 즉석에서 먹지 않아 이렇게 궁금한 일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