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만의 유니폼 제작기
나는 병원 사람이 되기 이전에 환자로서 종종 병원에 갈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병원 유니폼은 다 비슷하지? 나라면 더 예쁜 유니폼을 입을 것 같은데.'
점심시간인 12시~1시쯤 강남역이나 압구정 근처 병원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식당을 가면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누구든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들 비슷비슷한 병원 느낌이 폴폴 나는 유니폼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업종 특성에 따라 업무상 편리성을 위해 비슷한 요소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색상만 조금씩 다를 뿐, 디자인을 보면 대부분의 병원들이 일관성 있는 옷을 입는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 드는 걸까?
이런 나의 오지랖 넓은 궁금증의 해답은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나는 병원의 개원을 준비하면서 처음 입사할 때에 간호조무사도, 방사선사도 아닌 총괄 관리직으로 입사했었다. 때문에 기존 데스크팀이나 기사팀(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등) 직원들의 일반적인 병원 유니폼이 아닌 정장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 만약 나에게 진부하기 그지없는 기존의 병원유니폼을 입으라 했다면 나는 분명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입학 전 꼬까옷을 준비하는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내 유니폼을 선택하게 되었다.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옷을 입고 일해야지 라는 속내를 품고 인터넷에 '병원 유니폼'이라 검색을 해 본 나는 왜 그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유니폼을 입어야 했던 것인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병원 유니폼 업체 검색 결과에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몇몇 군데의 회사들이 있었다. 마치 기성복 쇼핑몰처럼 업체들마다의 사이트도 잘 구축해 두었고 네이버 쇼핑은 물론, 쿠팡에서까지 구매할 수 있게 꽤 다양한 플랫폼들에서 유니폼을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다양한 업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다들 비슷하고 뻔한 스타일의 유니폼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원에서의 첫 근무로 두근거리는 나의 들뜬 마음에 부흥하지 못하는 지루한 디자인들이 설렘 가득한 나의 유니폼 쇼핑 전의를 상실시켰다.
우리나라는 다들 알다시피 의료 강국이라 불릴 만큼 수준 높은 의료기관들이 밀집되어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의료진이 존재한다. K-healthcare, K-의료 라는 말이 무색하게 의료진들이 입는 유니폼 시장은 이 정도라니. 의료인의 유니폼에 누군가 법칙이라도 만든 것 같다. 누군가 이 일관적인 디자인을 시초로 했을 것이고 혁신이란 없이 이대로 이어져 온 것일 거다.
게다가 유니폼 금액은 저렴한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디자인이 괜찮은 (=그중 그나마 괜찮은) 유니폼을 선택하자니 생각보다 낮지 않은 금액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돈을 주고 이런 성의 없는 디자인의 유니폼을 사기에는 내 돈이 아니어도 아쉽다는 생각.
고민하던 나는 차라리 기성복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일하면서 입기에 좋은 단정한 정장 세트를 골라 구매하게 되었고, 덕분에 작은 만족감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병원의 경영자로서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시점. 우리 병원은 대대적인 확장 인테리어와 함께 리브랜딩을 진행하게 되었다. 병원 브랜드는 바꾸는 것이 쉽고 간단하지 않다. 병원 로고나 대표컬러 등이 바뀌게 되면 그에 따라 원내/외에 보여지는 많은 부분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 내 작은 홍보물부터 온라인상의 모든 내용 그리고 외부 간판까지. 그만큼 크고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5년간 바쁘게 달려오며 병원이 자리 잡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탓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래된 듯, 촌스러운 듯해도 그대로 이어온 많은 부분들이 있었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부분을 드디어 바꿔보자 라는 큰 마음을 먹은 것이다. 100평 대 두 개층과 50평대 한 개층을 전부 다시 인테리어 하는 이 좋은 찰나에 병원 브랜드 버벌을 다시 새롭게 만들고 이에 맞게 병원 컬러나 로고 등 모든 부분을 손보기로 했다.
나는 이때다! 라는 생각으로 우리 병원 전 직원의 유니폼을 바뀌는 분위기에 맞춰 전부 교체하기로 했다.
오래전 나의 첫 유니폼을 찾을 때의 심정으로 제일 먼저 인터넷에 '병원 유니폼'을 검색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를 것 없는 결과물에 병원에 첫 입사할 때의 기억과 함께 한숨이 나왔다.
비슷한 컬러, 비슷한 디자인....
온 업체의 쇼핑몰을 뒤져보고 그중 괜찮은 업체를 추렸다. 카탈로그도 받고 샘플도 받아 직원들을 입혀보았지만 유니폼 디자인도, 옷의 품질조차도 성에 차는 업체가 없었다. 만약 내 주변에 유니폼 회사 사장님이 있다면 다른 회사와는 차별된, 조금 더 예쁜 병원 유니폼을 만들어 보셔라!라고 적극 권하고 싶다. 병원은 유니폼에 돈을 쓸 수밖에 없다. 기존과는 다른 좋은 디자인의 유니폼이 있다면 어느 병원의 원장님이든 담당자이든지 그쪽을 선택할 것이다.
마음먹고 대대적인 리브랜딩과 인테리어를 하는 마당에, 병원내 첫 인상의 큰 요소인 유니폼을 가만 둘 수 없었다. 하여 나는 함께 리브랜딩을 진행하는 마케팅사와 함께 우리 병원의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현재 원내에 몇 종류의 유니폼과 가운이 있는지 취합하고 보니 팀 별로 생각보다 종류가 꽤 다양했다. 직원들의 락커룸 몇몇 칸이 각종 유니폼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원장단 가운까지 1종 추가요!
나는 옷을 입을 때에 예쁜 스카프로 목이나 헤어에 포인트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목걸이나 귀걸이를 화려하게 하는 편은 아닌데, 그 반짝임을 대신해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것 같아서다. 한 번은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왔더니, 대표원장님이 우스갯소리로 "유대표, 스카프 예쁜데! 여자들은 그렇게 잘하더라구, 우리 직원들도 일할 때 스카프 하고 하면 어때? 승무원들 보기 좋던데" 라며 농담조로 칭찬을 던지시곤 화장실로 사라지신 기억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병원 스카프와 고급스러운 뱃지를 추가로 제작해서 과하지 않은 포인트를 주기로 했다.
나는 애초에도 직원들의 유니폼을 전부 교체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업체의 다양한 유니폼을 후보에 두고 고심하며 골랐지만 전부 기성으로 나온 유니폼이다 보니 팀 간의 통일감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이전 사진들을 보니 별 뜻 없이 남색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구나 싶다.
나는 원내 곳곳 파트의 실무를 모두 경험해 본 덕에 직원들의 유니폼이 어느 부분이 개선이 필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직접 각 파트의 유니폼을 입어도 보고 벗어도 보고(?!) 일하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어디가 불편하고 거슬리는지 체크했다. 매일 입는 사람은 오히려 지금의 옷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지나쳐 버릴 작은 부분까지 모조리 캐치해내고 싶었다. 직원들이 불편했던 부분을 해소한 유니폼, 그리고 돈을 들여 제작하는 만큼 최고로 예쁘고 편하게 우리 병원의 이미지에 맞게, 만들어 보자는 내 열정이 불타올랐다.
각 팀에 요청사항을 물어보니, 저마다 기한 없이 묵혀놓았을 불편했던 부분들이 다양하게 들려왔다.
데스크팀
환자를 직접적으로 응대하는 팀으로 여기저기 환자분을 안내하고 찾으러 뛰어다녀야 하는 탓에 치마가 편한 재질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 그리고 업무 중에는 항상 무전기를 착용해야 하는데 무전기 무게 때문에 치마의 허리 부분이 늘어지는 것을 보완해 주는 것, 유니폼에 본인들의 카드 등 작은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속주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주사팀
주사는 잴 때마다 자주 주사제가 튈 수밖에 없는데, 수많은 앰플마다 형형색색인 탓에 항상 유니폼이 엉망이기 일쑤였다. 앞치마라도 해야 하나 싶었을 정도, 하지만 그러기엔 종일 정신없이 주사제를 재야 하는데 그때그때 입고 벗을 수 없었다. 주사제가 튀어도 표 나지 않는 색상, 역시나 활동적인 부분 그리고 환자분께 주사를 놓을 때에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집중해야 하기에 앞에서 가슴팍이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 주어야 했다.
도수/기사 팀
몸을 많이 사용하는 팀이기 때문에 허리 부분을 편하게 고무줄로 제작하기로 했다. 팔 부분과 바지폭을 여유 있게. 그리고 기사팀은 하프가운에 무전기나 펜을 넣어도 주머니가 처지지 않게, 그리고 현재의 기성가운들이 너무 펑퍼짐한 느낌의 일자라 허리라인을 살짝 넣어주기로 했다.
이외 원장님들의 가운과 환자복 등도 다시 제작하기로 했다. 제작해야 할 유니폼 개수가 만만치 않지만 오히려 들뜬 마음이 들었다. 예쁜 옷을 입고 환자들을 맞이하는 우리 직원들의 모습이 얼른 보고 싶었다.
직원들의 요청사항도 모두 접수했겠다, 이제 제작에 돌입하자!!
유니폼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수순으로 우리는 이미 병원의 컬러부터 로고까지 모든 부분을 정해두었다. 고급스러우면서 무게감도 있는 딥그린의 컬러를 새로운 병원 컬러로 정했고, 이에 맞는 분위기로 유니폼을 만들기로 했다.
이전에 의사가운을 제작할 때에는 테일러샵에서 보유하고 있는 원단을 활용해야 했기에 샵을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했지만 이번에는 원단이 몇 만개, 아니 그 이상이 쌓여있는 것 같은 동대문 원단상가를 가서 직접 보고 고르기로 했다. 동대문 원단시장은 원내외에 판매하던 건강기능식품의 VIP용 패키지를 만들 때에도 디자인팀과 자주 가보곤 했는데, 정작 옷을 만들러 가니 이전 패키지용 원단을 볼 때와는 사뭇 시선이 달라져야 했다. 그 작은 샘플을 당겨도 보고, 뒷면이 얼마나 비치는지도 확인해 보고.. 매 시즌마다 옷을 만들기 위해 이 크디큰 원단시장과 자재시장을 몇 번이고 돌아보는 의류업계의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나는 점포마다 가지런하고 수북하게 쌓여 있는 수만 개의 원단들 중에 이거다! 싶은 샘플들을 부지런히 챙겨댔다. 그 결과 제일 마음에 드는 원단을 선택할 수 있었다.
원단을 고르고 나서는 세부 디자인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성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정해진 55,66 사이즈대로 요청할 수는 없었다. 기본적인 사이즈를 가지고 우리 병원만의 미디움, 라지 사이즈의 기준을 정했다. 의류 제작 담당자분과 함께 직원들의 평균 사이즈를 재어 보고 좀 더 여유 있게 만들 부분과 라인을 잡아 줄일 부분을 작업 의뢰서에 상세히 작성했다.
나는 이때 제일 다양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간접적으로나마 옷을 만드는 일을 체험해 보는 기분이었다.
옷 전체 기장과 소매의 길이, 소매 끝의 트임을 몇 센티정도로 내야 보기에도 좋고 팔을 움직이는 것이 편할지부터 윗주머니, 아랫주머니, 안주머니의 위치와 깊이, 카라깃의 사이즈와 형태, 허리 부분 뒤트임은 어떻게 할지 등.. 단추 하나도 몇 개의 샘플을 보며 세심하게 선정했다. 옷 하나를 만드는 것이 이렇게 많은 결정이 필요한 것이었구나. 새삼 의상 디자이너의 섬세함을 알 수 있었다. 브랜드 시즌옷 컬렉션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얼마나 신경 쓸 것이 많은 것일까.
병원 자수를 어디에 넣을지도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병원 유니폼처럼 팔 상완 부분에 넣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우리는 앞 주머니 윗부분과 소매 끝 부분을 따라 일자로 고급지게 로고를 넣기로 했다. 윗주머니 부분에는 명찰을 부착할 위치도 미리 고려해 보고 소매 트임 안쪽은 움직일 때마다 로고가 슬쩍슬쩍 보일 수 있도록, 유니폼이지만 대놓고 우리 병원 이름이 딱 박혀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고와 따로 제작할 배지로 병원의 상징을 조금만 더해주면 될 것이다. 게다가 병원 로고가 연하게 보이는 스카프까지 착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샘플이 도착했다!!
첫 샘플로 온 유니폼을 몇몇 직원들에게 일주일 정도 입혀본 후, 단 한 가지의 보완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많은 유니폼들 중 한 가지의 수정사항이라면 정말 괜찮은 거다!
역시나 활동량이 많은 간호복에서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 간호팀의 밋밋한 스크럽복에 디자인적인 요소를 더하고자 배색컬러의 허리띠를 추가로 제작했었는데, 막상 만들어 착용해 보니 안 그래도 빳빳한 재질의 스크럽에 더해 활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보기에 좋은 것도 좋지만 우선순위는 업무에서의 편안함이었다. 고민 끝에 허리띠는 과감히 빼버리기로 결정.
모든 수정보완을 마치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유니폼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 병원은 이번 리브랜딩과 유니폼(+인테리어)으로
독일의 reddot. (레드닷) / 이탈리아의 A'design Award (에이디자인어워드) / 국제 디자인 어워드인 ASIA DESIGN PRIZE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에서 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유니폼을 바꾸고 나니 얻게 되는 장점들
1.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가 높아진다.
2. 환자들이 우리 직원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
3. 병원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기 좋다!
앞선 글에 이야기했듯 우리 병원은 환자가 몰려드는 아주 바쁜 병원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원내서 하루에도 몇 천보를 찍는 것은 기본. 정신없이 원내를 쏘다니던 직원들의 치마는 매일같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슬리퍼는 뜯어지기 일쑤였다. 그들이 이제는 예쁜 유니폼을 휘날리며 활보하는 모습에서 큰 뿌듯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