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기어코, 구태여
그래서 니가 나에게 왔었나 싶다.
한 여름 좁은 골목에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처럼,
질려버린 무더위를 지나 찾아온 가을아침
문득 만난 첫 입김처럼 그리고
무거웠던 하루를 짊어지고 문득 들어올린 시선 끝에 만난 새파란 하늘처럼.
눈 깜짝일 사이에 뜨겁게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완벽하다 생각했었는데
맥아리없이 와르르 무너져
공중으로 흩어지는걸 봤을때는,
도대체 네가 나에게 왜 왔을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멍하니 텅 빈 눈동자로 살아가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니가 나에게 이러려고 왔었나 싶다.
그 모든 것들을 느끼게 해주려고 왔었나 싶다.
네가 사라지고,
그 짧고 뜨거웠던 시간동안 내가 느낀건
과연 뭐였을까 생각했다.
사랑이라고 감히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와 이별을 하면 느껴지던
보통의 슬픔은 분명하게 아니었다.
내가 유리컵이고 내 안에 담긴 생각과 영혼과 자아가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었다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해서 가끔 녹아 물로 변해도 헤어지고 난 후면
다시 단단한 얼음으로 굳어졌었는데,
너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날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아온 몇 십년동안 얼음이었던 나를
완전하게 다른 존재로 그렇게.
너와 헤어지고나니
내가 공중으로 흩어져 한 없이 가벼워졌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허공에 떠있던 먼지를 타고 사라진 듯 했다.
드라이아이스가 된 기분.
녹는게 아니라 그저 공중으로 흩뿌려져
정착할 곳 없이 공간을 헤매는 느낌. 이라고 하면 알까.
너와 헤어진게 아니라
나의 일부와 헤어진 그런 느낌을
너는 알까.
이 모든걸 느끼게 해주려고 그렇게
기어이, 기어코, 구태여
나에게 왔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