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덜리스>
종종 보는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으로 두 손을 부여잡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난다.
저녁식사중에 보는 저녁뉴스 혹은 출근시간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그런 안타까운 사건사고들이 흘러나오곤 하는데, 많은 안타까운 사건사고들중에는 ‘어떡해’를연발하게하는 종류의 사건들이 있다. 그건
학교나 군대와같은 일반인들이 가득한 곳에 일어난 총기난사사건 혹은 왕따로인한 자살사건이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찬 울분을 무고한 피해자들에게 뱉어냈을때 일어나는 무섭고도 가슴아픈 일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해자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원인과, 마음속에 가득한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추모가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때마다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보다도 자신만의 사적인 이유로 공적인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점에서 많은 화가 나곤했다.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하게된 피해자들과 그들의 부모님들과 또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주변사람들. 모두가 이유없는 아픔을마음속에 간직한채 살아가야한다는 점이 두번 세번 가해자들을 향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마음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가장 무겁고 무섭고 잔인한 짐을 가슴에 짊어진채 살아가야하는것은 사건 속 가해자들의부모라는것을 나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영화는 많은영화들이 그러하듯, 영화는 잔잔하게 시작되고 많은 미국영화들의 인트로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전 부인과 함께사는 아들과술 한잔 마시자며 수업을 빠지고 나오라는 쿨(?)한 아버지 샘. 학교에 가야한다는 아들의 칼같은 거절에 함께하고싶던 그 술잔은 혼자 비우게되고,펍에 나오는 뉴스를 통해 아들은 피와 눈물로 비어진 술잔을 채워주었다.
샘은 아들을 잊고싶었다. 아들의 존재를 부정하고싶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지금의 내가 알리가 만무하지만, 러덜리스 속 샘의 모습은 아들을잃은 슬픔을 온데 뒤집어쓰고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고있었다.
꽤나 잘 나가던 광고기획자에서 페인트공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아들이 살아있었던 때의 삶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가던 샘에게 하루일과를 마치고찾아갔던 술집에서 불렀던 아들의 노래로 조금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냉정한 사회는 그조차도 샘에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영화는 중반부를 지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을 던져주었다. 수 많은 반전이 담긴 다양한 영화들을 접하면서 결코 접해보지 못했던 형태이기에 내속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잃어버렸었다.
샘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주고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번뜩 사회의 시선들과 샘의 아들이 사회에 들이민 날카로운 칼날에, 서있던 그 자리에 다시 우뚝서있을 수 밖에.
영화중 악기가게를 하는 ‘델’과 함께 차를 타고가는 샘은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고, 그에 돌아오는 델의 말에 이렇게 얘기한다. ‘그래도 내 아들이잖아.내 아들. 내 아들. 내 아들’
아들을 향한 샘의 눈물담긴 마지막 노래 ‘sing along’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금은 그들의 부모들이 안고가야하는 깊고잔인한상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 아이러니한 사실에 대해 영화 ‘러덜리스’는 그들만의 깊은 이야기를 건네준다.
영화가 끝난 지금에서도 귓가에는 샘이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이 세상 아픔을 가진 부모님들이 그들의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러덜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