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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17. 2016

2016.3.9

집 비우기 전에는 냉장고도 비워요.

                                                                                                                                               항상 장보기는 숙제다. 잘하고 싶어서 메모를 한다. 더 잘하고 싶을 때는 메뉴를 적고 그 옆에 재료를 적은 후에 사야 할 것들을 체크해보기도 한다. 아파트에 살 때는 한창 식사 준비를 하는 중이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그대로 나가서 단지 안의 슈퍼에서 구해오곤 했지만 간장 한 병이라도 사려면 일단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이곳의 살림은 그런 걸 허용하지 않으므로 장보기를 잘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출장을 앞두거나 명절 같은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난 이번에도 실패를 하고 말았다. 메모를 들고 가면 뭐 하나. 보고도 그냥 오고 만 걸. 계란 얘기다. 



분명 계란이 떨어진 걸 알고 있었고 계란들이 모여있는 코너 앞에서 계란을 고르던 중에 메추리알이 눈에 들어왔다. 아, 메추리알 조림을 해 놓으면 밥반찬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에 메추리알을 두 판 장바구니에 담고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계란 조림을 하려고 계란을 사러 가지 않았음에도 메추리알을 샀으니 계란을 제쳐버린 이유가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꽈리고추와 함께 간장조림을 해서 키가 큰 유리용기에 담았다.



오징어는 두 가지가 있었다. 얼리지 않은 오징어는 얼린 오징어에 비해 가격이 세 배였다. 난 선동 오징어라고 적힌 오징어 팩을 집어 들었다.



역시 꽈리고추와 함께 간장조림. 짭조름한 밥반찬이다.



냉장고 구석 깊숙한 곳에 바질 페스토 한 병이 남아 있었고 세탁실 한편에는 종이봉투에 담긴 감자 두 알이 있었다. 남아있던 껍질콩을 데치고 깍둑 썰기한 감자를 삶아서 뜨거울 때 바질 페스토에 버무렸다.



샐러드도 아니고 반찬도 아니라는 말은 샐러드도 되고 반찬도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이럴 때 나는 언제나 후자의 편이 된다. 



오메부시도 병에 담아서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내가 없는 동안 먹을 걸 찾아 냉장고를 뒤지다가 오래되어 굳어버린 치즈나 시든 야채,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우유 들을 발견하게 될 불상사에 대비해서 냉장고를 훑었다. 몽당연필처럼 작은 무조각, 시들어가는 붉은 고추 한 개를 버리고 불고기 재운 것이 조금 남았길래 대파와 두부, 당면을 조금 넣고 간단 전골을 끓였다. 피클과 새로 만든 반찬들로 점심을 차리면서도 계속 계란이 아쉬웠다. 계란 한 줄이 있었으면 계란말이도 할 수 있고 샌드위치도 만들어 둘 수 있는 데다가 있는 반죽으로 타르트를 구워둘 수도 있었지만 역시 계란이 문제였다. 대파도 있고 북어채도 있으니 계란만 있었으면 북엇국이라도 끓여둘 수 있잖아 하면서 종일 계란 타령에 하루가 갔다.

병에 넣어 갈무리해둔 먹거리들과 보리차가 담긴 병을 냉장고에 나란히 넣어두었다.
곰국 대신 보리차를 끓이고 햄버거집 쿠폰이랑 멤버십 카드를 내어 놓으면 나의 출장 준비는 끝이다.
이제는 나의 짐을 싸자. 
그런데 주문한 책은 왜 안 오는 것일까?
마땅히 가져갈 책이 없으면 불안증에 걸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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