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주부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본에 갈 때마다 제일 부러운 게 동네마다 볼 수 있는 작은 야채가게들과 백화점 지하의 슈퍼마켓이다. 도심의 번화한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 한적한 동네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야채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대개는 머릿수건과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아저씨나 할머니들이 주인장인데 손님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없을 때에도 항상 분주하다. 깨끗하게 잘 다듬어진 야채와 과일들은 스티로폼접시나 비닐봉지 대신 종이 상자나 바구니에 담겨 있고 한결같이 깨끗하고 신선해서 맵시 있는 아가씨처럼 보인다. 백화점의 야채코너에서 진열대에 놓여있는 가지가지 야채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으로 장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장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이런저런 것들을 사서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다듬어 조리하고 싶은 마음이 그만 손으로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그중에 제일이 하얗고 동그란 순무다.
작년에 기치조오지의 한 꽃집에서 순무 씨앗 한 봉지를 샀다. 봄이 한창일 때 씨앗을 뿌렸는데 기특하게 싹도 잘 나오고 무럭무럭 자라서 제법 여러 개를 수확할 수 있었다. 부드럽고 소박한 단맛에 반해서 올해는 작년보다 많이 심었다. 열무를 닮은 잎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하얀 뿌리가 흙 위로 몸을 드러내면 수확할 때가 다가온 거다. 모종을 나무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정말 잘 자라서 작은 순무 밭이 되었다. 종종 이파리들을 옆으로 밀쳐내고 뿌리를 확인한다. 제법 살집이 붙은 아이들을 뽑아서 껍질을 벗겨 그대로 먹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즙이 많은 소박한 맛에 반해버렸다. 채소를 이용한 소박한 요리를 선보이는 다카야마 나오미의 말을 빌리자면 순무는 겨울이 다가올수록 속이 차는 채소라서 1~2월 경이 되면 단맛이 살아난다고 한다. 봄에 나는 순무는 부드럽고 싱싱해서 샐러드로 신선한 맛을 즐기기에 좋고, 으스러질 정도로 푹 익혀도 맛있고 살짝 굽거나 데쳐서 씹는 맛을 살려도 좋다고 하는데 어떤 요리를 하든 양념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순무 자체의 맛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늦봄의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순무들을 뽑았다. 그동안 미루던 겨된장 절임에 첫 번째 주인공으로 순무와 당근, 오이를 선택했다. 깨끗하게 씻어서 물기를 거둔 다음 굵은소금으로 문질러 그대로 겨된장에 넣으면 된다. 하루가 지난 후에 꺼내어서 재빨리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 그만이다. 색색의 절임 야채들이 선사하는 순하고 여린 맛에 먹는 사람조차 착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순무를 먹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올리브오일에 굽는 것인데 두께 1cm 정도로 자른 순무를 올리브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 굽는다. 조금 센 불에 올려서 한 쪽 면이 노릇하게 구워질 때까지 뒤집지 않고 두었다가 한 번만 뒤집어서 살짝 익힌 후에 꺼내어 접시에 담고 소금과 후추를 뿌리면 끝이다. 풍미가 좋은 올리브오일에 소금과 후추를 그 자리에서 갈아 뿌려 먹는 사치스러운 맛. 맥주 생각이 나는 순간이다.
식당에 가면 아주 작은 콩접시에 절임 한두 가지가 나온다. 먹어보면 오돌오돌하니 담백하고 간이 슴슴해서 처음에는 이걸 무슨 맛으로 먹나 했지만 먹어볼수록 자연스러운 매력에 이끌리게 된 절임을 오늘 나도 만들어봤다. 순무 5 개를 부채꼴로 썰어서 소금 1/2 티스푼을 뿌려 20분 정도 놓아두면 수분이 생긴다. 다시마를 사방 5cm로 자른 것을 다시 반을 잘라 함께 보존 용기에 넣는데 이때 순무에서 나온 수분도 함께 붓는다. 냉장고에서 3~4일간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내일 먹어볼 예정이다.
순무 잎은 꼭 열무처럼 생겼다. 냄새를 맡으면 약간 매콤한 듯한 느낌이 더욱 그렇다. 절임을 만들고 남은 초록 잎을 넣어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스파게티 면은 포장지에 적힌 시간보다 2분 정도 짧게 삶는다. 햄을 약간 썰어서 올리브오일을 두른 팬에 볶다가 순무 잎 자른 것을 넣고 휘리릭 저은 다음 스파게티, 스파게티 삶은 물 2 큰 술, 버터 약간을 넣어 재빨리 섞은 후에 그레이터에 간 치즈를 뿌려 한두 번 휘감으면 끝이다. 오늘 나의 점심 식사. 맛은 루콜라에 가깝고 식감은 소송채에 가깝다.
순무는 아직 반 넘어 남았지만 나의 작은 순무 밭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쉬운 나는 순무 씨앗을 더 뿌리려고 한다. 화분에 씨앗을 뿌려 그늘에서 싹을 틔우고 비 내리는 날을 골라 화단에 옮겨 심어야지. 겨울 순무가 더 알차다고 했으니 심어서 수확하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궁금하면 물어보기, 하고 싶으면 망설이지 않기, 잘 사는 방법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