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혼자 가기로 정했던 하루 여행이었다. 시간 맞춰 서울역에 가면 알아서 데려다주고 끼니도 챙겨주고 꽃길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마당에는 아직도 치워야 할 빈 화분과 정리해야 할 가지들이 많았고 남편과 아이는 슬슬 지쳐가고 있는 데다가 출장도 코앞이고 결정해야 할 일도 한 건 있었다. 전날 샌드위치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으면서도 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오늘 새벽에 난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ktx 를 타고 신경주역까지 간 후 버스로 이동했다. 오어사와 영일대, 호미곶을 들르는 하루 일정이었지만 영일대는 꽃놀이 인파로 접근하지 못하고 근처의 다른 꽃길을 걸었다.
절에 가서는 절집보다는 절마당 귀퉁이에 서있는 동백이랑 민들레에 더 마음이 쓰였다. 마치 자리를 잘못 잡은 듯이 가지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속으로 속으로 모아서 핀 붉은 꽃송이들이 애달팠고 자라지도 못하고 작은 키에 노란 얼굴의 민들레가 안쓰러웠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맑아서 이름과 주소가 쓰인 검은 기와에 담긴 기대와 바램들은 조금씩 가벼워졌을 거였다. 벌써 초파일 준비가 한창이라 오색 등을 달고 있는 풍경을 나른하게 바라보자니 볕은 따갑고 바람은 선들거려 어디 등받이 의자라도 있었다면 잠시 앉아서 낮잠을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봄날에 낮잠을 자면 그 꿈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말이다. 물가에 서서 바람을 맞으면서도 계속 자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햇볕 아래 잠을 자다가 잠깐씩 눈을 뜨고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가 제자리에 있는지만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버드나무만 제자리에 있으면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도끼자루가 썩어있으면 할 수 없는 거고.
과수원인 듯한 곳을 지날 때마다 꽃밭이었다. 복숭아꽃이 핀 곳은 분홍이고 하얀 꽃이 핀 곳은 배밭이었다. 가다가 한두 그루 목련이 꽃송이를 활짝 열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 진저리가 쳐졌다. 몸살이 날 만큼 좋다란 말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님을 알겠다. 거기 벚나무 꽃터널도 개나리 덤불도 조팝나무 울타리도 유채밭도 모두 그랬다. 유채밭이 있는 주변에 포장마차들이 몇 개 있었는데 파는 물건들은 모두 엇비슷해서 말린 오징어나 쥐포, 미역귀랑 다시마 등이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었다. 유채밭이 있으니 혹시 유채꽃을 살 수 있을까 했지만 말도 못 꺼냈다. 멋쩍게 돌아 나오는 내 뒤에 대고 별 이상한 여자를 다 보겠다고 수군거릴 것 같아서. 아, 나는 도대체 얼마를 더 살아야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호미곶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웃음이 났다. 이 햇볕, 이 바람, 이 냄새를 머리카락에 손끝에 어깨에 조금씩 묻혀가서 조미료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햇볕으로 버무린 나물, 바람을 넣고 휘휘 저은 냉국에 포항의 바다 냄새로 간을 한 샐러드로 상을 차리는 상상. 내가 미쳤나 봐.
이번에는 빈손으로 다녀왔지만 다음번 소풍에는 바구니를 들고 가야겠다. 가지가지 샌드위치랑 딸기랑 미니토마토, 콜라와 애플 사이다 그리고 와인까지, 불량식품도 빠질 수 없다.
어제 만든 샌드위치는 아니지만 이렇게 차려놓고 즐거웠던 날도 있었으니 기억을 위해서라도 올려둔다.
브로콜리와 새우는 데쳐내고 채쳐서 물기를 짠 양파와 삶은 계란 으깨어 넣고 마요네즈로 버무린 속을 넣은 모닝롤 샌드위치다.
작은 사이즈의 토르티야를 살짝 구워서 부드러운 상추 한 장 깔고 모닝롤에 넣었던 브로콜리 새우 샐러드를 넣고 꼭꼭 말면 롤 샌드위치다.
계란에 미림과 설탕, 소금을 약간 넣어 부드럽고 폭신한 계란말이를 한 다음 딸기잼을 바른 식빵에 얹어 만든 계란 샌드위치다.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먹을 때마다 일본 드라마 '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의 아키코짱이 생각난다.
크림치즈와 연어, 양파와 상추를 넣은 바게트 샌드위치.
바게트나 치아바타를 반으로 자른 후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얇게 썬 오이, 치즈, 햄을 차례로 올린 것. 사실 식빵에 신선한 마요네즈를 바르고 얇게 저민 오이를 가지런히 올려서 만든 샌드위치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오이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선한 재료는 물론이고 아주 잘 드는 칼이 필요하다. 한 번에 깨끗하고 완벽하게 잘려서 식빵과 오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루키가 그랬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식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만 모아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누가 그 수고를 좀 해주지 않으려나. 샌드위치 얘기하다가 하루키가 웬 말인지.
사진은 어느 날씨 좋은 주말 아침에 느지막이 차린 샌드위치 플레이트다. 어제는 치즈와 햄, 상추에 아이올리 소스를 발라서 간단하게 한 가지만 만들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다녀와서 물으니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한다. 곰국 대신 샌드위치구나. 한 바구니 만들어 이 봄이 가기 전에 소풍 한 번 더 가야지. 가져간 불량식품과 샌드위치를 다 먹고 빈 바구니에는 봄이 만들어준 햇볕, 바람, 냄새를 가득 담아와야겠다. 우울할 때 조금, 기운 없을 때 한 줌, 심술 날 때 한 움큼씩 쓰려면 큰 바구니가 필요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