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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13. 2016

2016.6.13 - 유월의 색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갑자기 내가 있는 배경이 바뀐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제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공기의 질과 바람의 방향이 바뀐 듯하여 고개를 들면 구름의 색도 그 너머 하늘의 깊이도 달라져있다. 어느 날 낮잠 자고 일어난 후지와라 신야는 아마도 이것을 일컬어 '인생의 낮잠'이라 했을 테지. 내가 만약 낮잠을 잤으면 '인생의 낮잠'이 되었을 텐데 그건 아니니 나는 '인생의 몸살'이나 '인생의 꾀병'이라 해야겠다.



복숭아꽃은 잎도 나기 전에 화려하게 피어서 마당을 밝히지만 복분자 꽃은 피는 둥 마는 둥 하여 눈여겨보지 않으면 꽃이 피었다가 지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붉게 변하기 시작한 열매를 보고는 흥분하는 거다. 오늘의 나처럼. 복분자는 곧 검게 반짝이겠지만 복숭아는 아직도 푸르고 푸르니 어린애임에 틀림없다. 안 익은 복숭아 먹고 배탈 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



머루도 주렁주렁 달렸다. 머루 꽃도 복분자 꽃처럼 희고 작아서 눈에 뜨이지 않는다. 나 여기 있다고 요란스럽게 나풀거리는 것으로는 모자라 꽃향기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냄새까지 곁들이는 밤꽃에 비하면 얌전하다고 해야겠지.



시장 갈 때마다 블루베리 앞에서 서성였다. 오늘 드디어 블루베리가 색을 입기 시작한 걸 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구나. 블루베리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 아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꽃이 피었다가 시들지도 않고 어느 날 뚝뚝 떨어져 버린다. 그 자리에 꽃을 닮은 열매를 하나씩 달고서, 저 열매가 언제 자라나 아무리 기다려도 통 기미가 안 보이다가 어느 날 보라색 옷을 입으면서 갑자기 커 버리는 열매. 밤을 새워 지키면 블루베리가 크기와 색을 바꾸는 현장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



처음에는 애지중지하다가 이제는 태곳적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편안한 풍경이 되어버린 수국. 꽃잎 하나 따는 것도 손을 덜덜 떨던 내가 요즘은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다. 



냉면이나 메밀국수를 담으면 어울릴 유리그릇에 꽃을 담았다. 누구는 손님이 오면 꽃을 한 바구니 따서 내놨다고 한다. 꽃잎을 하나씩 따서 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면 꽃을 닮아서 점점 순해지고 착해져서 갔다고 하던데 어디 나도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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