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크루제 냄비에 토마토를 담고 제일 약한 불에 올려뒀다. 한 시간 반 너머 놔두었다가 뚜껑을 열어보니 토마토에서 나온 즙에 물컹해진 토마토가 담겨있다. 마늘 다지고 마른 고추 빻아서 올리브유에 볶아 매콤한 향이 올라왔을 때 토마토를 넣고 으깬 후 뭉근한 불에서 끓인다. 바질을 넉넉하게 뜯어와서 토마토가 끓고 있는 냄비에 넣고 함께 끓여서 토마토소스를 만들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뭉근하게 졸인 토마토소스는 식료품점에서 사온 것과는 달리 붉지 않고 주황빛이다. 어제 토마토소스를 만든 이유는 라자냐를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장바구니에 라자냐가 들어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라자냐 만들기는 오늘로 옮겨졌다.
양파를 다지고 다진 고기를 넣어 볶다가 어제 만든 토마토소스를 넣고 졸여서 걸쭉한 상태가 될 때까지 끓여놓고 시금치를 데쳐서 잘게 잘라 리코타 치즈와 섞었다. 오븐 접시에 토마토소스와 시금치, 라자냐를 번갈아가며 쌓아올린 후에 치즈를 얹고 오븐에 집어넣었다. 오븐에서 켜켜이 쌓은 토마토와 고기와 시금치와 라자냐면이 하나로 뭉쳐지는 동안 나는 땅콩을 삶고 시금치 데친 냄비를 씻고 보리차를 끓인다. 치즈가 들어있던 플라스틱 용기를 분리수거함에 넣고 세탁기에서 젖은 빨래를 꺼내서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날은 벌써 어둡고 오늘의 할 일이란 메모 리스트에는 아직도 서너 개의 항목이 남아있다.
십분 정도만 삶으면 된다고 하는 생땅콩은 한 시간이 넘게 끓은 후에야 부드러워졌고 보리차는 예상만큼 구수하고 진하지 않았다. 데친 시금치는 붉은 기가 도는 초록색 물을 남기고 개운한 듯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부드러워졌다.언제나 그렇다. 나는 시금치를 삶을 때마다 시금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몸이 무거운가? 가벼워지고 싶은가? 부드러워지고 싶은가? 아니면 전혀 다른 물성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숨이 탁탁 막히는 문장들을 읽고, 책을 엎어둔 채로 후추를 갈고 고추장을 퍼 담는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읽을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갈 때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나갔다 왔다. 오늘 내가 움직인 딱 그만큼 함께 움직인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