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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01. 2016

TOKYO SHOP - 오늘의 질문, 취향(趣向)

                                                                                                                                                                            

어제는 날씨가 맑았으므로 세탁기를 돌렸다.


세탁물 바구니를 들고나가서 빨래를 탁탁 터는데 예전 같지 않았다. 공기가 차가워지면 습기가 섬유에 더 찰싹 달라붙는 것인지 가뿐한 느낌은 오간데 없고 축축하고 무거우니 마당에 빨래 너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보라색과 남색 스카프들도 추워 보이더라.



나무들 중 많은 것들이 아직은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내일은 영하로 기온이 떨어진다고 한다. 어느새 종일 난방을 해야 하고 장작 바구니를 들고 다녀야 하는 계절이 왔다. 오랜만에 혼자 외출한 날, 블라우스에 홑겹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갔다가 사람들의 옷차림에 놀라고 말았다. 모직코트에 머플러, 패딩들을 챙겨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다. 맞아. 기운 없어 조용히 지내던 그 며칠 사이에 나도 몰래 겨울이 왔구나 싶었다. 의류매장을 돌아다니다가 니트 한 장을 손에 쥐고 거울 앞에 섰는데 손에 쥔 니트의 색과 모양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거뭇한 눈가와 윤기 없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붙들렸다. 아침에 아이 방에 들어가서 청소하다가 무심결에 올라가 본 체중계의 숫자가 줄어들었던 게 생각났다. 나이가 드니 체중이 주는 게 꼭 반가운 건 아니구나. 옷이고 뭐고 얼굴색이나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주말에 도착한 책 한 권. 표지를 펼치자마자 낯익은 가게의 사진이 나온다.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잡아낸 도쿄의 가게들과 갤러리, 박물관과 음식점들이다. 제법 자주 가는 편이라 책에 나온 곳 중 많은 곳이 낯익은 곳이어서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시선에 따라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하느라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본에 다니기 시작한 지 거의 1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모습을 지키는 가게들이 유난히 많은 도시가 도쿄라고 생각하는데 어느 곳은 당당해서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되는 반면에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 못 본 척하고 싶어지는 곳들도 있다. 분명 오래된 물건들인데도 기능이나 디자인이 요즘 나온 것들에 뒤지지 않고, 첨단의 물건들과 나란히 놓고 보아도 잘 어울리는 비결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물건들이 여전히 제 기능을 다하며 사랑받는 현장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물론 유행에 따라 부침이 심한 가게들도 없지 않으나 트렌드나 시대의 변화에 무덤덤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이 우리의 서울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입니다. 그걸 정하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 저절로 알게 되지요.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지금 내게 어울리는지 생각해보세요. 아직 20대인데 고급 시계를 찬 사람을 보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죠. 그런 고가의 물건은 조금 더 인생 경험을 쌓은 뒤 구입해도 늦지 않아요. 기분 좋은 생활이란 물건이 넘쳐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세 평 남짓한 낡은 아파트에서 가족이 생활하던 때가 있었어요. 풍족하진 않았지만 지금도 자랑스러운 건 어머니가 매일 유리창을 닦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집은 늘 유리가 깨끗했지요. 덕분에 방 안은 밝은 빛으로 가득했어요. 바로 이런 것이 풍요로운 삶이라고 생각해요."
                                                                                      p. 291



저자의 시선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일관된 흐름이 보이고 절로 취향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게 취향이 있었던가. 아니 나는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을까? 언젠가 이야기 도중에 '스타일'을 화두로 삼은 적이 있었다. 남들은 '저건 내 스타일이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잘도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듣고 앉아 있으니 누가 바로 그게 내 스타일이라고 해줘서 웃고 말았는데 오늘 다시 그 질문의 늪에 빠졌다. 국어사전은 취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고 알려준다. 취향을 알면 나를 알겠구나. 만약 없다면 닮고 싶은 취향을 담은 책, '도쿄 숍'이다. 도쿄 여행을 계획하거나 앞두고 있다면 놓치지 말 것.



날이 추워진다고 하는데 아직 봉오리를 맺은 꽃이 있어서 한 줄기씩 잘랐다. 물을 담은 유리병에 닿은 햇살을 좋아하는데 그럼 이건 나의 취향의 일부분으로 기억할 것.


화분을 들여오는 것으로 겨울 준비가 시작되었다.
집안은 겨울 준비로 부산하고
나는 뒤늦게 취향 찾기로 부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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