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Nov 24. 2016

그림책을 좋아하세요?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최혜진


어릴 때 그림책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자신의 책이라고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책들은 문고판 크기의 5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으로 거칠고 누런 종이에 삽화도 없었던 것이다. 나무로 만든 작은 전용 책장도 있었는데 한지를 바른 문을 통과한 오후의 햇살이 방안을 채울 즈음에 그 책들을 가지고 놀던 시간들은 아마도 내 몸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는 걸 나는 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책에 그림이 곁들여진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 딱히 기억이 나는 그림들이 없는 걸 보면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댈 만큼의 파장은 없지 않았나 싶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림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 핑계를 대고 무던히도 많이 사들였던 그림책들 중 몇몇 권은 아직도 내 책장에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어서 심심한 날에는 한두 권씩 꺼내어 들추는 호사를 부리기도 한다. 브런치에서 알게 되고, '명화가 내게 묻다'로 깊은 인상을 준 작가 최혜진, 그녀의 신간을 기다렸었다. 유럽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내게 '매일 정육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규칙적으로 일터에 나가 일하는 것의 의미와 무게감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의미 있게 다가왔는지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마치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기복 없이, 대단한 기대감이나 불안감 없이, 어제 노력했던 일을 오늘 또 해보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 지겨워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런 날들이 모여 빛나는 한 달이 되고 아름다운 한 해가 되는 기적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기쁨을 준 책이다(세르주 블로크). 




세탁기 앞에 앉아서 드럼이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일, 분리수거를 나갔다가 그대로 서서 숲의 나무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헤아려보는 일, 때로는 장작불이 타는 소리에 홀려 저녁시간을 놓치는 내게 '부모님께 받은 가장 큰 유산은 기다리는 법을 훈련시켜주신 것이라고, 수익성이나 본전 계산 없이 경험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시간들, 새소리를 듣기 위해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일,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일처럼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땐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써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키워주신 걸'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다고(안 에르보).




나는 밤마다 머리도 비우고 가슴도 비운다. 새 날을 준비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매일 조금씩 더 아름다워져서 그만큼씩 슬퍼지는 날들을 온전히 담으려면 비울 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한다. 간혹 동쪽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든 날에는 오늘은 하늘 구경만 할 거야 하고 누가 묻지도 않는데 소리를 내어 말하기도 한다. 다짐처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철부지라고 여기는 내가 '어른이 된 이후의 감탄은 결심에서 나옵니다. 나는 이제부터 여기 앉아서 구름을 보겠다, 늘 보던 구름이지만 저것이 흥미롭게 느껴질 때까지 앉아서 바라보겠다고 결심하면 됩니다(클로드 퐁티).' 라고 쓰여진 문장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6,708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그녀가 만났을 밀도 높은 시간을 부러워하고 인터뷰가 끝나고 마주했을 시간들을 질투했다. 세상의 온갖 핑계를 끌어다 대기에 급급했던 내 젊은 시절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부끄러워하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녀의 앞날을 기대하는 이유 중에는 그녀의 젊음도 들어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TOKYO SHOP - 오늘의 질문, 취향(趣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