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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2. 2017

문제가 있습니다 - 사노 요코와 감자

                                                                                                                                                                                                                                                                                                    

카레라이스를 먹기로 했다. 감자 한 알만 있으면 충분했다. 시들었지만 양파도 있고 애호박도 반 토막 너머 남아있었다. 조금 질기겠지만 풍미가 좋은 양지머리도 있으니 제격이었다. 마트에서 우유와 참치캔을 바구니에 담다가 그 생각을 해내고는 자신이 얼마나 기특한지 몰랐다. 



카트를 돌려서 감자 파는 곳으로 갔다. 상자에 든 감자를 세일한다고 한다. 2킬로그램 한 상자에 5,900원이라고 했다. 감자도 많으면 숙제처럼 먹어야 하므로 반갑지 않았다. 조금 비싸겠지만 딱 한 알만 사서 깔끔하게 먹어치우자고 생각하면서 감자 한 알을 골라 비닐에 담았다. 무게를 달고 가격표를 붙이는데 아,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다. 감자 한 알의 가격이 2,900원이란다. 세상에! 바로 옆에는 한 상자에 가득 담긴 감자가 5,900원인데 이건 아니지 싶었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감자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이 슬라이드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시작은 바로 그거였다.

 


감자는 많았고 눈은 내렸다. 감자 샐러드나 다진 쇠고기를 섞은 크로켓이나 감자를 익히는 게 제일 큰일이다. 쉽게 만들려면 큼직하게 썰어서 끓는 물에 삶아내고, 맛있게 만들려면 껍질째 쪄서 만든다. 두 가지 모두 감자가 뜨거울 때 으깨야 만들기도 쉽고 간도 잘 맞는다. 오이와 양파를 소금에 살짝 절여서 물기를 짜고 햄과 당근을 썰어 넣고 만든 감자 샐러드.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식빵이 눈에 들어와 즉석 샌드위치를 만들어 보았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종종 즐거운 건 이런 때다. 생각지도 않았던 먹을거리가 뜻밖에 맛있을 때가 그렇다.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린 다진 쇠고기를 버터에 볶다가 잘게 썬 양파를 넣고 함께 볶는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후에 뜨거울 때 으깬 감자와 섞는 게 포인트다. 그래야 무리 없이 골고루 잘 섞인다. 동그랗게 빚어서 박력분, 계란물, 빵가루 순으로 입혀서 튀기면 된다. 사실 처음 만들어 본 음식인데 간도 잘 맞고 모양도 예뻐서 만드는 이와 먹는 이가 함께 만족스러웠던 음식이다. 



일은 단조롭고 비슷비슷해서 손놀림은 무심한 것 같지만 사실 거의 모든 음식 만들기에는 포인트가 있다. 감자는 뜨거울 때 으깨야 한다거나, 멸치를 볶을 때는 기름 없이 한 번 볶아서 양념이 끓을 때 넣고 살짝 버무린 후 바로 불을 꺼야 한다는 것, 크로켓 반죽에 생크림 약간을 넣으면 놀랄만큼 크리미한 질감을 낸다는 것, 냉동 새우를 끓는 물에 데칠 때 식초를 조금 넣으면 맛이 한결 깔끔해진다는 것 등이 그렇다. 사는 것도 그렇다. 그저 그런 매일의 일상이 미래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삶에 포인트를 넣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을.


눈이 내린 마당, 20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눈이 내려 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고 커피는 뜨겁고 맛있었지만 나는 눈도 무겁고 가슴도 답답했다. 아침 식탁에서 일어나면서 자야겠어라고 중얼거렸다. 책장이 있는 방의 난로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어서 마침 좋았다. 엊그제 새로 산 사노 요코의 '문제가 있습니다'를 들고 누워버렸다. 몇 장 읽다 보면 절로 잠이 오겠지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의 책은 여러 권을 가지고 있다. 책마다 겹치는 에피소드도 제법 있어서 어쩐지 익숙한 친구와의 수다 같은 느낌인데 오늘 읽은 글들은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평소 가볍게 어울리던 친구와 밤을 새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다. 항상 잘 웃고 시원시원해서 걱정거리나 고민 같은 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 혹은 덜렁거리고 싱거운 사람으로 알았던 이가 의외로 정도 많고 속이 깊으며 치밀하고 층이 많은 정신세계를 가진 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무엇이든 대충 넘어가고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보이는 사람일수록 그 속은 더욱 여리고 섬세한 경우가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책 읽기였다. 혼자 킥킥거리며 웃다가 깔깔깔 웃으며 구르다가 숙연해졌다가 감탄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눈도 맑아지고 머리도 시원해졌다. 이런 명약이 있을 수가! 덕분에 점심은 밥솥을 끌어안고 눌어붙은 밥알까지 긁어서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녀의 다른 책에 비해 '책'이야기가 많다. 그녀가 다독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지독한 책읽기라니! 아소 총리가 한자를 잘못 읽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여섯 손가락의 남자]는 어디에 있나'를 읽을 때는 너무 웃겨서 숨이 막힐 뻔했고,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받을 때의 수상 연설을 읽을 때는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데 책 마지막의 해설에서 실제 시상식장에서 박장대소가 이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왜 그렇게 기쁘던지.

문장은 짧다. 
순식간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래서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세상이 모두 한 방향만을 보고 달려가도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당연히 울어 마땅한 때 웃을 수 있지만 
웃으면서도 슬픔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한순간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그녀의 책을 일본어로 읽고 싶다는 것,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인데
어쩌나,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분하다.
책이야 아쉬운 대로 번역본이 있으니 일본어 공부는 안 하기로 한다.
사노처럼 나도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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