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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16.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11- 봄바람

새벽 공기는 차다. 얼굴을 내밀면 순간 피부에 살얼음이 덮이는 듯 조이는 느낌이 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둠과 밝음이 자리를 바꾸는 시간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쿡탑에 올리고 흩어진 컵들을 모아 싱크에 넣는 동안에 넘실거리는 아침의 햇빛으로 바뀐다. 



주방의 창문으로 봄 볕이 여과 없이 들어온다. 보자기 하나로 당해낼 수 없지만 그냥 흉내라도 내보는 거다.  물론 쏟아져 들어오는 그 귀여운 봄날의 아침햇살을 모두 가려버릴 생각은 애초에 없다. 봄바람이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면 봄볕은 온몸과 온 정신을 뒤흔든다. 그야말로 내 존재를 빨래 털듯이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것이다. 



아침에 빛이 가득한 주방에서 라디오까지 틀어놓았으면서 나는 왜 순하지 못할까? 계란을 터뜨려 풀고 시금치와 토마토를 볶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빨래는 세탁기 안에서 순조롭게 돌아가고 해는 말간 얼굴로 동동 떠있는데 왜 심술이 나는가 말이다. 누구라서 봄날이 불러온 심통을 이겨낼 재간이 있을까 싶지만.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로 가라앉을 것도 아니지만. 봄이 영영 이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아직 뽑아낼 풀도 많지 않은데.



겨우내 집안에 초록을 풀어내던 아이들이 모두 나가고, 마당에는 양지바른 곳에서부터 꼬물꼬물 새싹들이 돋아났다. 어제는 작은 모판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고운 님이 보내주신 제라늄들을 화분에 옮겼다.  등에 내려앉는 햇살이 따스했으나 바람은 고약하게 불어서 나른하게 풀어지다가도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고는 했다. 



초록 잎이 나오는 걸 보고 놀랐던 게 언제일까. 그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쪽파 몇 뿌리를 뽑았다. 잘 드는 칼로 탁탁 잘라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진간장 한 큰 술, 집간장 한 큰 술, 참기름 한 작은 술에 쫑쫑 썬 쪽파 한 움큼이면 된다. 꽃 모양의 작은 도자기에 담아두고 식탁 가운데에 자리를 잡게 했다. 멸치와 다시마와 대파 뿌리로 우린 따끈한 육수에 삶은 국수를 담고 당근과 애호박을 채쳐서 볶은 것, 계란지단 썰은 것을 올려 잔치국수라 부르면서 점심상이다. 양념장을 얹으니 마음이 좀 풀렸나. 저녁에도 식탁 가운데에 놓았다. 이번에는 기름 없이 불 맛만 더한 김이다. 양념장을 넉넉히 만든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도는 걸 나도 알겠다.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양념장이 남아있던 어제저녁은 솥에 남아있던 찬 밥에 물을 붓고 끓였다. 밥알이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엇이든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강낭콩을 두어 지은 밥이라 김이 폴폴 나는 물밥에 양념장을 한 방울 떨어트려도 맛이 확 살아난다. 겨우내 먹었던 김치는 발효란 게 어떤 것이라는 걸 온몸으로 알려주면서 대충 차린 저녁상에 균형을 잡아 주었다. 엄마는 어제 봄 김장을 하셨다고 했고 우리 집에는 오늘 택배아저씨가 벨을 누르겠다. 



아. 심술 나는 봄.
생각이란 건 별로 좋을 게 없다고 여기는 게 나은 경우도 종종 있다.
생각, 그거 많이 해봐야 인생이 더 복잡해보이고 어려워 보이더만.
양념장의 마력은 끝났으니 청소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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