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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31.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13 - 읽기

미용실에서 책읽기


'인숙만필'은 미용실에 갈 때 참 좋다. 쉽게 빠져들 수 있고 또 쉽게 덮을 수 있다. 좋은 책이 으레 그렇듯 읽을 때마다 새 책을 읽는 기분이다. 그제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이 책을 읽자니 잊고 있었던 봄바람, 바람에 덜컹거리는 문, 휘날리는 머리카락, 무거운 책가방, 광화문의 '미리내', 냉면 등등이 꼬리를 물고 내 머리와 가슴속을 한바탕 휘저어놓았다. 

가늘고 매끄럽고 차가운 면발의 감촉을 이와 혀와 목젖에 아련히 느끼며 겨자와 식초를 진하게 푼 물냉면을 훌훌 들이켜면 순간적으로 일종의 명정 상태에 빠진다. 모든 권태가 깨지고 확 깨어나는 느낌인데 깨어서 예민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가 씻기는 기분인 것이다. 온몸 가득 미각이 곤두선 채. (p.45)



집에서 냉면을 손수 만들어 자주 먹으며 친구들에게 대접하기도 좋아하는 저자가 추천하는 건 청수냉면이다. 염색을 마치고  지하 슈퍼에 가서 청수냉면을 찾았다. 없다. 아쉬웠지만 동치미 냉면이 먹음직스럽게 그려져있는 걸 한 봉지 골랐다. 그게 어제 점심이었다. 계란 두 개를 삶아서 하나는 먹고 하나는 반을 갈랐다. 고명이라야 오이 밖에 없지만 한 입 넣으니 좋았다. 모든 '권태가 깨지는 기분'이나 '존재가 씻길' 정도는 아니었던 건 그녀만큼 겨자와 식초를 많이 넣지 않은 때문이었을까. 




내가 요즘 다니는 미용실의 직원들은 책을 좋아한다. 내가 책을 들고 앉으면 꼭 그 책에 대해 한두 마디씩 언급해준다. 알고 보니 그 미용실은 직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정해서 읽게 한단다. 그게 싫다고 하는 직원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저 모두들 열심히 읽는 모양이었다. 내가 읽는 책이 궁금한 만큼 그녀들 또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해서 우리는 잠시 책 읽기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그들은 바쁜 몸이므로 금방 자리를 뜨기 일쑤이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묵 속으로, 책 속으로, 인숙만필에게로 돌아간다.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구한 인숙만필


책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음, 잘 차려진 밥상 앞에 앉은 기분이다. 이것도 저것도 한 번씩은 다 먹어보고 싶고, 젓가락이 한 번씩 입안에 들어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하거나 놀라는 것. 어떤 음식은 한 번으로 족하고, 또 어떤 음식은 자꾸만 손이 가서 접시를 비우게 하고, 또 그중에 몇몇은 나중에까지 기억이 나고, 그러다가 한두 가지는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 일. 

책을 고르고 읽는 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듣는 일,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는 일, 그 말에 놀라고 감탄하다가 다시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일, 아직 읽지 않은 책에 관해 다른 이가 이야기하는 걸 듣는 일, 그렇게 내 하루의 지평을 넓히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일, 그러다가 나에 대해 조금씩 더 잘 알게 되는 거라는 게 내 생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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