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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25.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16 - 4월 마당

                                                                                                                                                                                                                                                                                                 

집을 에워싼 벚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봄은 이미 무르익어서 농익는다. 


새들은 흥에 겨워 울다가 수련을 담아놓은 양동이에 와서 목욕을 한다. 어느 밤에 문득 소쩍새가 울기 시작하면 가슴이 벌렁댄다. 봄에 소쩍새를 울게 하는 유전자가 있듯이 내게는 소쩍새 울음에 반응하는 유전자가 있는 탓이다.



목련과 조팝은 닮았다. 꽃이 피는 시기가 비슷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아련하고 서늘한 향기도 그렇다. 목련과 조팝의 흰색을 닮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나를 비웃듯이 화려한 분홍의 풀또기가 피어난다.



메마른 나뭇가지가 도저히 뚫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좁쌀처럼 멍울이 생기고 콩알처럼 부풀어 가지 가득 봉오리가 매달린 채로 며칠을 난다. 봄볕이 좋은 어느 날 폭죽이 터지듯이 꽃이 열린다. 긴 가지 앞에 서서 몇 줄기 꺾어서 동그랗게 묶으면 그대로 리스나 화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손이 근질거렸으나 기어이 가위를 갖다 대지 못하였다.



풀또기의 분홍에 일어난 멀미는 선홍색 명자꽃으로 더해진다. 작약과 모란과 장미들도 제각각의 색을 뽐낼 터이니 올해는 무색 꽃들은 들이지 않기로 하였다.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아도 멀미가 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마당에 더 이상 색을 입히면 그만 탈이 나고 말 것 같아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겨울에 준비하는 튤립 구근들을 흰색 위주로 골랐다. 흰색에 살구빛이나 분홍빛이 살짝 덧입혀진 느낌까지만 허락할 심산이었다. 처음 들인 크리스마스로즈도 연둣빛이 도는 흰색이고, 라난큘러스도 아이보리톤의 흰색을 데려왔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했던 것처럼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꽃으로 마당을 채웠으니 나 또한 맑고 깨끗한 사람이 되겠구나 했다면 웃으시려나.



나는 희고 푸른 마당을 갖고 싶었으니 복분자의 꽃은 흰색이고 물망초는 청보라 빛이라 해를 이어 피어나는 이런 식물들은 얼마나 고맙고 기꺼운지 물망초가 제 자리를 벗어나 잔디밭으로 넘어간 것을 보아도 그저 예쁘기만 하였다.



올해는 튤립 구입처를 바꾸었다. 결과는 참패다. 흰색은 흰색이되 모양새가 곱지 않고 거친 데다가 살구빛이 도는 흰색이나 분홍빛이 도는 흰색이라고 생각했던 품종은 도발적인 주황과 핫핑크로 피어나 나를 아연하게 하였으니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면 절로 한숨이 난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니 꽃과 나는 서로에게 미안해하느라 봄이 어떻게 지나는지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하였다.



하긴 잘디잔 씨앗들과 아기 주먹만 한 구근들 속에 어떤 모양과 색의 꽃들이 숨어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활짝 핀 색색의 꽃들을 사진으로 찍어 씨앗 봉지에 붙여놓으면 그 사진을 보고 고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믿지 않으면 도리가 없기는 하다. 탐스러운 당근이나 순무의 사진을 보고 씨앗을 뿌려놓고 아무 기척이 없는 흙을 몇 날 며칠 들여다보면서 아삭한 당근이나 부드러운 순무를 베어 무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날들이긴하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있다. 등에 내려앉는 햇살이 따끈한 요즘 같은 날에 나는 주방 앞 주목 아래 숨어있는 무스카리를 기억하고 소나무 아래 바위 틈에서 비죽 솟아 나온 둥굴레의 종 같은 연두색 꽃을 찾아낼 수 있다. 이사 오면서 들고 온 노란색 크로커스는 칠 년째 접어드는 올해도 황금빛 꽃을 딱 한 송이 피워 건재함을 알렸고 역시 몇 년째 같은 자리에서 별 같은 꽃송이 두 개로 인사하는 보라색 히아신스가 있다. 수국 덤불 아래 부추는 터줏대감이고 블루베리 아래 있던 곰취는 목련 그늘 아래로 옮겨주었다. 목련 아래 살던 옥잠화는 올해 긴 화단으로 옮겼더니 조금 더디어서 이제야 촉을 내밀고 있다.



상추잎을 뜯었다. 어느새 마당의 채소를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시절이 왔다. 상추는 쌈으로 샐러드로 샌드위치나 햄버거 용으로도 즐겨 쓴다. 빨간 무는 너무 일찍 심은 탓인지 수확기가 지났는데도 너무 작아서 며칠 더 놓아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모두 뽑아냈다. 손가락 마디처럼 가늘고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크다. 무는 잘라서 샐러드에 뿌리고 잎은 반으로 갈라서 반은 샐러드로 나머지는 데쳐서 된장찌개에 넣었다. 알싸한 무의 매운맛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애가 자기주장이 강하네! 씨앗을 다시 뿌려서 튼실하게 키워볼 예정이다. 



해마다 봄마다 마당은 몸살을 앓는다. 욕심 많고 일관성 없는 주인 탓이다. 나무 몇 그루에 절로 나는 꽃 두어 포기만으로 살자 했다가 동화 속 꽃밭처럼 꾸며보자고 분주하고 어느 해는 온갖 허브를 늘어놓기도 했다. 올해는 흰색과 푸른색의 고요하고 차분한 정원을 꿈꿨으되 내 앞에 보이는 건 도발적이고 농염한 꽃과 작은 나무와 채소 모종과 뿌려놓고 잊어버린 세상의 모든 씨앗들이 잠든 실험성 짙은 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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