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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22. 2020

여름의 색

하지

아침저녁으로 상추를 거둔다. 겨자잎과 파슬리, 루꼴라는 벌써 꽃대가 나온 지 오래다. 이른 봄, 얼음이 풀린 땅에서 부추며 돌미나리의 새싹을 발견하면 벌써부터 코 끝에 그것들의 향기가 맴돈다. 상추와 쑥갓, 바질 등의 모종을 고를 때도 같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바질 페스토와 부추김치를 만들자고, 끼니때마다 샐러드를 빼놓지 말자는 다짐을 올해도 거르지 않았다. 마당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욕심을 잔뜩 부린 사람도, 꽃대를 벌써 올렸다고, 눈치도 없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열매를 이리도 많이 달았다고 눈을 흘기는 사람도 바로 나다. 오늘 아침에는 상추와 순무, 토마토를 넣은 샐러드를 먹었다.


양상추와 루꼴라


앵두꽃이 유난히 많이 달려서 작은 나무 전체가 꽃으로 뒤덮인 봄이었다. 가지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촘촘히 달렸던 앵두꽃에 벌들이 날아들더니 어느 날 꽃 진 자리마다 작은 초록색 앵두가 맺혔다.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보이던 작은 열매가 점점 통통해지고 붉은 물이 들더니 이윽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앵두로 뒤덮인 가지들이 휘어져 땅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서서 앵두에 손을 대면 후두득 떨어졌다. 앵두 잼을 한 병 만들고 나머지는 설탕에 버무려 유리병에 담았다. 청이 되든 효소가 되든 유리병에 담긴 붉은 앵두즙은 가을이 깊어지면서 달고 시원한 걸 좋아하는 식구들 앞에 놓이게 될터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재난문자 알림과 마스크, 자극적인 뉴스에 혼을 빼앗긴 사이 파슬리는 벌써 씨방을 만들었고 블랙커런트는 농익어서 절로 떨어진다. 언제인가 싶게 물망초도 작약도 스러지고 장미는 추레해지고 수국이 피어난다. 마당을 바라볼 때마다, 마당에 나가서 동백 그늘을 들여다보고 치자의 꽃봉오리를 발견할 때마다 각자의 때를 알아서 피고 지고 열매 맺는 식물들의 정직함에 주눅 든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도 놓치지 않겠다던 욕심은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아니 라벤더는 왜 하필 장미가 한창일 때 향기가 짙고, 상추와 샐러리가 가득한 시기에 어쩌자고 순무는 맛이 드는가? 왜 모두의 찰나가 동시에 내게로 오는가? 잠깐만 하고 돌아서 보면 벌써 사그라진 꽃잎, 스러진 아름다움에 아쉬울 겨를도 없는 날들이 간다.



마당의 식물들과 책상 위에 흩어진 메모들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기 있으니 보고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당장 달려오라고  막무가내다. 때를 놓치면 산마늘 잎은 세어버리고   앵두는 떨어진다. 화르르 떨어져 버린 장미도 오늘 주우면 꽃잎이지만 내일은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오늘 완성하지 못한 문장은 내일 진부한 넋두리가 되어버린다. 그걸 알면서도 나아갈 수 없는 마음을 누구라서 헤아려줄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꺼번에 달려드는데야 당해낼 재간이 없다. 꽃을 보기에는 아침 해가 내 어깨쯤 올라왔을 때가 으뜸이다. 해가 머리 위에 올라온 즈음이면 꽃들은 벌써 생기를 잃는다.  책을 읽거나 짧은 글을 쓰기에  맞춤한 시간도 바로 그때다. 나는 초록색 마당과 휘갈겨 쓴 메모가 어지러운 공책을 오가며 바쁜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남겨둔 메모를 읽어 내려가며 뿌듯하지만 그뿐, 글을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메모는 메모일 뿐이란 뼈아픈 가르침을 얻은 유월.



하지(夏至)다. 24절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이때 태양은 황도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긴 날이다. 내일부터는 낮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름이 뒷모습을 보이는 듯 나는 벌써부터 서운하다. 마음껏 웃고 마음껏 말하지 못해서일까? 내 속에 뭔가 남아 있는데, 아직 만들지 못한 문장들과 흩어진 단어들이 어지럽다. 내게 비밀스러운 꿈이 있다면 그건 내가 나에게 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그 꿈을 꿀 수 있을는지, 무엇보다 그 다함없는 꿈을 담아내기에 여름은 너무 짧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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