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눈부시게 살아있다. 새로 돋아난 초록색 이파리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며칠 전인데 지금은 사춘기 아이들처럼 엉성하면서도 뾰족하고, 성기면서도 거칠다. 초록 사이에서 새들은 여전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휘파람같은 울음으로 하루를 여는 새(이름을 모름)가 있다. 뻐꾸기가 종일 울다가 소쩍새에 자리를 내어주면 이른 저녁이 내린다. 산비들기가 종일 우는데 난 그늘 아래서 신록의 기쁨을 노래하는 글을 읽다가 종종 낮잠에 빠진다.
책장을 넘기다가 졸음이 오는 듯 하면 눈을 부릅떠보기도 하고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같은 페이지를 열댓 번이나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생기는 건 바로 그런 때다. 졸음에서 헤어나오지도, 책을 놓아버리지도 못하지만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안다. 책을 덮고 계절 속으로, 삶 속으로 들어가기. 그게 왜 쉽지 않은 건지 꿈 속에서도 생각한다.
그을리고 메말라 암록색 핏줄이 도드라진 아름다운 손을 가졌던 외할머니의 눈물 같은 머루나무의 새 잎.
껍질이 갈라지도록 검게 말라버린 머루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도 오월, 매일 짙어지는 초록 사이에서 손가락 같은 잎새들이 더이상 신기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은방울꽃이 피고 물망초가 마당을 푸르게 물들이는 때다. 고목 어딘가 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면 목이 아프다.
고양이들은 아예 눌러앉아 살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는 게 늦어지면 보란듯이 유리문 밖을 오간다. 문을 열고 나가면 멀리 있다가도 달려와 발밑에서 뒹군다. 풀을 뽑는 옆으로 슥 지나가거나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누워서 풀뿌리를 잡아당기는 나를 구경한다. 고양이들은 날아다니는 것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까치와 지빠귀, 나비 같은 것. 나뭇가지나 꽃잎 위에 올라앉은 그네들을 올려다보고 몰래 다가가다가 꽃에 취한 나비가 어쩌다 앞발에라도 걸리면 이게 뭐냐고, 무섭다고 난리다. 그러나 마당을 집으로 삼은 이들 고양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꽃그늘 아래 앉아서 꽃구경 하기!
돌미나리 샐러드와 곰취 나물
머리가 복잡할 때는 마당이 최고다. 잡풀을 뽑겠다고 덤불 앞에 주저앉아 민트줄기 하나를 잡아당기면 뿌리까지 줄줄이 뽑혀나온다. 곰취랑 머위, 민트가 섞여 자라는 곳에서 웃자란 민트를 뽑다가 곰취에 눈길이 머문다. 가위를 가져다가 손바닥만큼 자란 곰취잎을 잘랐다. 끓는 물에 데쳐서 소금으로 간하고 들기름과 깨소금을 더해 무친다. 간을 본다고 나물 한줄기를 입에 넣었다가 깜짝 놀란다.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와락 든다. 풀 뽑는 건 벌써 뒷전, 밥을 짓고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먹으면서 하루치의 우울을 슬쩍 밀어 안 보이게 만드는 거다. 내가 그거 하나는 잘 하지.
장미가 피기 시작한다. 작약이 봉오리를 열면 벌레들도 자란다. 사는 건 끊임없이 문을 열고 닫는 일이며 모퉁이를 돌고 강을 건너 그 너머에 닿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제 내가 처음으로 가닿게 될 그곳이 생판 낯선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다. 늦었다고 초조하지도 않다. 나는 메일의 시작을 마음에 담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