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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13. 2020

머루야? 포도야?


유리창 밖으로 비가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다가 놀라고 말았다. 마당이 훤했다. 엊그제만 해도 작은 숲처럼 나무와 풀들이 무성해서 답답하기까지 했던 마당이었다. 남편은 소나무에 기대 놓은 사다리 끝에 걸터앉은 채 나뭇가지들을 쳐내고 있는 중이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작약과 은방울꽃, 데이지가 모여 살던 곳도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어느새 마당을 정리할 때가 왔나 싶은 마음에 아쉬움이 왈칵 몰려들었다. 하긴 벌써 라벤더를 잘라 말려두었고 바질도 정리해서 페스토를 만들어두지 않았는가. 봄이 봄 같지 않고 장마철인데 비도 많지 않다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봐야 계절이 가고 오는 건 매정할 만큼 정확하다. 마당을 끼고 살다 보니 점점 마당을 닮아가게 된다. 제일 먼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기해야 할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함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나의 게으름을 절대로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자연의 완고함에 익숙해진다.


2020년 7월의 마당


이맘때의 마당은 채소들을 모아두는 냉장고와도 같다. 한동안은 상추를 매일 거뒀다. 아침이면 들고나간 작은 양푼에 상추, 방울토마토와 블루베리, 바질 잎 등을 얹어 들어올 수 있었다. 가지를 찌거나 볶아서 나물을 만들고, 호박은 전을 부치거나 새우젓을 넣고 볶아서 먹는다. 파슬리와 샐러리로 수프를 끓이고 샐러드를 만드는 것은 성공했으나 고수와 루꼴라는 거두기도 전에 꽃이 피어버려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제 마음대로 싹이 터서 자란 들깨는 잎을 정리해서 데친 다음 볶은 나물을 만들어먹었다. 곰취와 돌미나리, 부추도 때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모른 척 외면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골고루 심어놓은 먹거리들을 때를 놓치지 않고 거두어 먹는 일이 마당을 가진 즐거움이긴 해도 상추 한 바구니, 부추 한 줌에 휘둘리는 내 모습이 항상 마음에 드는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무르익는 4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모종 시장을 찾아가거나 씨앗 봉지를 들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는 일을 반복한다. 지금은 7월, 어제 아침에는 토마토와 블루베리와 바질 잎을 따왔다.


토마토 브루스케타


나는 요리책 보기를 즐기고, 식재료 쇼핑도 즐기고, 엉뚱한 시도로 돌발상황도 자주 만들지만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듯싶다. 레시피를 읽고 음식 사진을 보면서 맛있겠다고,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만큼 먹고 싶지는 않은 게 신기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고 마침 그 음식이 내가 만들 수 있으면 신이 난다(사실 많은 시간을 어떤 음식을 만들지 결정하는데 쓴다. 종종 식사 준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꿈속에서까지 내일 아침에 뭘 먹을지 궁리할 때도 있다). 마침 토마토가 익는 계절인 데다가 정리하면서 두어 포기 남겨둔 바질과 바게트가 있어 가능했던 아침밥상. 생마늘을 잘라서 올리브 오일에 구운 빵에 문지르면서 생각한다. 만들고 싶은, 혹은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마당에서 얻을 수 있는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인지, 혹은 아침으로 무얼 먹는가 같은 사소한 일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이유가 혹시 해야 할 일들을 슬쩍 잊은 척하기 위함인지 잘 모르겠다는.



볕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바질 잎이 탔다. 몇 장 필요해서 반짝이는 이파리를 손톱으로 끊으면 바질 특유의 달콤함이 아침을 감싼다. 달콤함이 점차 줄어들고 싸한 향기가 나기 시작하면 바질의 철도 끝나간다는 뜻이다. 올해는 예년보다 빠른 듯 하지만 미적거리다가는 때를 놓칠지도 모르기에 과감하게 뿌리째 뽑아서 다듬었다. 진한 향기가  아찔하다. 잎을 씻어서 물기를 거두고 마늘 껍질을 벗겼다. 잣을 팬에 볶아 노릇하게 굽고 치즈를 곱게 갈았다. 믹서에 넣고 페이스트가 될 때까지 갈면 끝이다. 진하고 선명한 초록색 바질 페스토가 두 병, 한 병은 엄마에게 보내고 한 병은 냉장고에 넣었다. 양이 적어서 아쉽지만 때를 놓치지 않은 게 어디냐 싶다. 요즘은 그렇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제대로 해내기가 쉽지 않고, 또 그래서 별 일이 아닌데도 마치고 나면 내가 대견하고 기특하다. 매사를 그런 마음으로 대하고 싶다. 삶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싶다. 가끔 체로 거르거나 키질을 해서 본질만 남기고 싶다. 내가 끝까지 남기고 싶은, 그러니까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건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날의 바질 페스토, 그러니까 ‘바질 페스토 다움’이다. 매일의 ‘다움’을 조금씩 모아 보면 훗날 내게 걸맞은 ‘아름다움’이란 걸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산다.



뚱뚱해지기 시작한 호박을 길이로 네 등분해서 씨가 생기기 시작한 가운데 부분을 잘라냈다. 달군 팬에 기름을 붓고  으스러뜨린  마늘을 넣어 향이 나면 호박을 넣어 볶았다. 새우젓을 한 숟가락 넣어 간을 했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거다. 뭘까? 냉동실 아래칸에 숨어있던 말린 고추를 하나 꺼내어 가위로 잘랐다. 어렸을 때 엄마가 고명으로 쓰던 실고추를 기억하고 있다. 고추 하나를 가늘게 채를 치면 여러 번 사용할 양이 나온다. 나는 남은 그것을 작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엄마는 실고추를 하얀 한지에 싸서 찬장 서랍에 넣어두곤 했었다. 엄마의 반찬 냄새가 밴 찬장이 그립다. 그동안 생각도 않던 것인데, 엄마가 그 찬장을 사용하지 않게 된지도 몇십 년은 지났을 텐데 새삼 그 찬장을 열고 그 안에서 깻잎 장아찌나 상추 겉절이가 담긴 접시를 꺼내는 상상을 해본다. 그뿐이다. 찬장은 없지만 말린 고추도 새우젓도 엄마가 준 식재료다. 엄마 집에 다녀올 때마다 음식을 가져온다. 이번에는 열무김치와 오이지, 도토리묵과 마늘장아찌를 가져왔다. 엄마가 준 음식, 특히 김치를 먹을 때마다 엄마를 먹는 것 같다.  김치 냉장고의 김치통을 자주 열지 않는 이유다.


머루인지 포도인지 모를 송이, 그리고 수국


파고라 기둥을 타고 머루와 포도가 어울려 자란다. 머루라고 하기에는 송이가 크고 포도라고 하기엔 너무 성글다. 밑동에서부터 꼬이고 얽혀 자라는 아이들이라 머루인지 포도인지 분명히 하려면 송이가 열린 줄기를 따라 거꾸로 내려가야 한다. 밑동이 더 굵은 것이 머루임은 분명하므로(머루를 몇 해 먼저 심었으니까) 알고 싶으면 잠시 멈춰서 두 그루의 나뭇가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매번 올려볼 때마다 궁금해하면서도 실제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머루면 어떻고 포도면 어떠랴 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분명히 옳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음을 꾸역꾸역 받아들여가며 살아야 하는 시절, 포도니 머루니 하는 것도 부질없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꾼다. 이렇게 아름답고 벅찬 초록을 앞에 두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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