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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5. 2021

도서 심의 후유증

2021. 1. 15

  지난 늦가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도서 심의*에 참여했다. 처음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는 책 읽기가 뭐 어렵겠나 싶었다. 특별히 다른 일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지루하기도 했던 터라 가볍게 받아들였다. 물론 실수였다. 3주가 채 안 되는 동안 60여 권의 수필집을 읽고 검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검토서를 제출해야 하는 날을 지키려면 매일 하루에 3권 정도씩 읽어나가야 했다. 그것도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주어진 책들이었다.  


언젠가 내가 선택했던 책들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기계적으로 책을 펴 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모자랐다. 중반 이후에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틈틈이 읽었다. 책마다 간절한 표정의 얼굴들이 보였다. 책을 읽는 건 책을 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때만큼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읽고 싶었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객관적인 지표 작성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 것의 온도 차이는 컸다. 읽고 싶어 골랐던 책에서보다 심의도서라는 꼬리표를 단 책들에게서 작가의 실체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모든 작가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만으로 책을 쓴 건 아니었을 텐데도 내 앞의 책들이 사람, 그러니까 나로서는 작가의 실체로 보였다. 아닌 척 포장해도 다 보이는 듯했다. 무서운 일이었다.


  오늘 오랜 지인과 카톡으로 얘기를 나눴다. 읽은, 읽고 있는 책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결국 자기 얘기들을 한 거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왜 그런가요?"

"그건 이러저러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말과 글을 타인에게 나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더듬어봤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 시작은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던 때였을지도 몰랐다.


바네사 울프가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


  중학생 때 국어시험의 마지막 문제가 글짓기였던 적이 있었다. 자기 자신에 관해 짧은 글을 써보라는 거였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 첫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두어 개의 글을 읽어주었다. 그중 하나는 “친구들은 나를 괴팍한 아이라고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그걸 내가 왜 아직도 기억하는가 하면 그 글이 바로 내가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이들이 웃었고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는데 선생님이 우리가 쓴 글을 읽으면서도 그 글을 쓴 아이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들은 나를 괴팍한 아이라고 한다’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내가 얼마나 괴팍하지 않은 아이인지를 밝히려고 애썼다. 나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지 잘 몰라서 매일 좌충우돌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사실 그리 유별나지도 않고 까다롭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다만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 꼭 필요해서 종종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소망이 있다면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지 몰라 속이 상한다는 얘기를 자못 비장한 어조로 써 내려가서 누군가가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때도 나는 나를 설명하던 아이였다.


  도서 심의가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난 지금에도 쓴다는 일, 곧 나를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내가 쓴 어쭙잖은 글에서 어쭙잖은 내가 그대로 보일 터였다. 뭐라고 쓰든 그게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하고 매일 단어를 바꾸어가며 문장을 만드는 일이라면? 여전히 중학생이었던 때에서 한 발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신을 매일 다시 불러내고 있다면?

그럼에도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아서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도 괜찮은 건 아닐까? 

내가 내게만 지지 않는다면?"

중얼거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2020년 3차 도서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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