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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1. 2021

주방에서

2021. 1. 21

  식사 준비를 하려고 주방에 들어서면 난감할 때가 많다.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을 때 특히 그렇다. 게다가 냉장고 안에서 마땅한 식재료들을 찾을 수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밑반찬을 장만해두지 못하는 내 탓이다. 냉장고 속 야채 토막들을 꺼내 가늘게 채를 쳐서 샐러드라고 내놓거나 김 한 접시, 부각 한 접시, 계란찜과 김치 한 보시기로 상을 차리는 날은 나도 내가 별로다.



  붉은색 파프리카 한 알로 무얼 할 수 있을까? 꼭지를 떼어내고 반으로 갈라 씨앗을 털어낸 다음 가늘게 채를 쳐서 찬물에 담갔다가 샐러드에 넣으면 아삭한 식감이 싱그러울 것이다. 바닥이 두꺼운 냄비에 버터를 녹인 후 채 썬 양파를 오래 볶다가 토마토와 당근, 그리고 이 붉은 파프리카를 한 입 크기로 썰어 넣고 큼지막한 깍두기처럼 썬 고기와 함께 볶은 후 육수를 붓고 뭉근하게 한 시간쯤 끓이면 언 몸을 녹이는 붉은 수프가 되겠다. 아니면 껍질이 바싹 타도록 구워서 탄 껍질을 벗겨내고 단 맛을 올려 라타뚜이를 만들거나 구운 야채샐러드에 고명처럼 얹어도 좋을 것이다. 싱크대 앞에 서서 길게 잘라 그냥 씹어 먹어도 달콤한 즙이 일품일 테고.


떡국 사진 대신 냉이 된장찌개 준비하는 사진


  꽁꽁 얼어있던 떡국떡을 꺼내 떡국을 끓였다. 육수를 끓이다가 떡을 넣어 떠오르면 계란을 한 개 풀어서 천천히 넣었다. 국물이 탁해진다. 어슷 썬 파를 듬뿍 넣었다. 국물이 순식간에 맑아진다. 계란을 넣어 마무리하는 국에 파를 썰어 넣으면 안개가 걷히듯이 탁한 기운이 사라진다. 어제 나가서 대파를 사 온 건 잘한 일이다. 그러나 함께 집어 온 꽈리고추는 실망이었다. 씻어서 물기를 턴 후 반으로 가르니 씨앗이 갈색이었다. 수확한 지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다. 대파 다섯 뿌리가 들어있는 비닐봉지에 붙어있던 8300원이란 가격표에 놀란 다음이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냉큼 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보통은 고추 안에 들어있는 씨앗을 잘 털어내지 않지만 갈색 고추 씨앗은 예외가 되었다. 냉동실에 한 줌 남았던 멸치와 함께 볶았더니 작은 밀폐용기가 미처 차지 않는다. 한 번 더 먹으면 끝이겠다. 청량고추는 물기를 거두고 쫑쫑 썰어서 냉동실에 넣었다. 대파도 다듬어서 이삼일 쓸 것만 놔두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했다. 냉장실은 물과 우유와 양념 외에는 별 게 없어 훤한데 냉동실은 비좁다. 가난한 것 같아도 부자고, 부자인 줄 알았는데 가난한 게 우리 집 냉장고다. 나와 똑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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