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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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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02. 2024

그래도 봄은 오고

  감기에 걸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몸속에 얼음덩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발작적인 기침이 찾아오면 이러다가 몸이 부서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게 고통스러웠다. 이래서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잠이 왔다. 식탁에 앉거나 싱크대 앞에 서있으면서도 동시에 잠에 빠져있는 신기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입을 열면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라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정신을 빼앗긴 사람처럼 멍한 상태였지만 어쩐지 홀가분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꼭 해야 할 일이란 게 없었고,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 한다는 규칙들도 사라진 듯했다. 모든 것이 멈췄지만 그건 모든 것이 열려 있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하여 신기하게도 매사가 괜찮았다. 식사준비도 집안 정리도 하지 않았지만 끼니도 거르지 않았고 집안이 난장판이 되지도 않았다. 고장 났던 식기세척기도 멀쩡해졌다(아, 물론 수리비는 많이 지불했지만).


  앓는 동안 꿈을 여러 번 꾸었다. 뭐 특별한 꿈은 아니었다. 대부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정도였다. 특별한 게 없는 사건들이라 꿈을 꾸지 않았다면 돌아볼 일도 없었을 순간들이 번갈아 찾아와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짧고 두서없는 꿈들 중 가장 여러 번 꾸었던 꿈은 오사다 히로시의 작은 책 [심호흡의 필요]를 읽는 것이었다, 어김없이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때였다. 그때 너는 이제, 한 명의 아이가 아니라, 한 명의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는데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어른을 읽는 내 목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나서는 잠든 동안 목의 통증이 거의 줄어들지 않은 걸 확인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속에서 나는 앞사람의 의자 뒤에 붙어있는 모니터의 운항정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비행고도, 잔여비행거리, 외부온도, 도착예정시간이 떠 있는 모니터 말이다. 꿈속에서 나는 꽤나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어서 몇 분에 한 번씩 화면이 바뀌어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걸 외우기라도 해야 하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모니터의 비행기 아이콘은 오사카와 부산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가끔 스튜어디스가 지나가고 어떤 이가 코를 골았다(물론 꿈속에서였다). 창밖의 구름은 마치 끓어오르는 바다 같았다. 나는 꿈속에서도 비행기 엔진의 소음을 귓전에 흘리면서(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건조가 끝났다는 알람이었다) 배를 타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상에 빠졌다. 그렇게 중력을 거스르며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지 미안하게 느껴져서는 지금의 내가 된 게 내 탓은 아니라고 변명 비슷한 걸 늘어놓는  동시에 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이렇게 툴툴거리는 건 그만해야  한다고 다짐했으니 지극히 아이다운 꿈이기도 했다.



  앞서 모든 게 멈췄다고 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감기 역시 지나간 사건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문득 눈앞이 선명해지더니 창밖으로 노란 햇빛이 넘실거리기에 홀린 듯 마당으로 나섰다. 꽃봉오리를 물고 있는 크로커스 잎의 초록색줄무늬가 창창했다. 터질 듯 부푼 매화봉오리와 새초롬한 라일락 꽃눈 아래 작약의 붉은 싹도 거침이 없다. 녹슨 도구들이 쌓여있던 곳에서 용케 가위 하나를 찾아들었다. 가윗날이 엇갈려 말을 듣지 않지만 사실 가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바삭 마른 채로 겨울을 난 콩과 바질이 순순히 뽑혀 나왔다. 속이 빈 줄기를 손바닥 안에서 으스러뜨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봄이구나!



  가장 궁금했던 건 구근들이었다. 튤립, 무스카리, 크로커스, 히아신스, 수선화들을 살폈다. 기대하면 안 되었던 걸 모르지 않지만 꽃대를 문 튤립이 많지 않은 데다가, 히아신스 꽃대는 듬성듬성하여 민망할 지경이고 무스카리와 크로커스는 반 넘어 줄었다. 두 곳으로 나뉘어 작은 군락을 이루고 있던 수선화 역시 한 곳만 남았다. 구근을 보충하지 않은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어가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봄이 와서야 아, 지난가을에는 구근도 챙기질 못했네,라는 변명이자 후회일 문장 하나를 봄이 찾아온 마당에 부려놓고 나 몰라라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새해에는 구덩이마다 넘치도록 구근들을 채워 넣으리라던 혼잣말은 말 그대로 허공에 떠돌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게 놓아두었던가. 여전히 감기를 앓는 사람처럼 나는 헐렁해진 마음으로 메마른 잔디밭을 휘적휘적 걸어 다닌다.



  내게서 감기를 넘겨받은 남편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상추 모종을 사러 가자 하길래 따라나섰다. 눈이 부셨다. 메마른 길가에 봄볕이 부서지는데 같은 모양의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한다. 선거유세가 시작되었나 보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절을 하고 손을 흔든다. 평소 보이지 않던 유권자들을 행여 놓칠세라 부릅뜬 눈이 정작 봄을 놓치지는 않을까 공연히 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설마 바로 옆에 서있는 산수유나무의 노랑을 놓치기야 하겠나? 몇 년 동안 봄을 가꾸지도 못한 주제에 남 걱정 하느라 버드나무 연둣빛 바람에 인사도 못하고 만다. 모종 파는 농원에서 젊은 여자가 웃음을 터트린다. 대파 심을래. 나도 샀다. 대파 모종 20개에 2,000원. 오다가 슈퍼에서 월동한 무 한 개와 시금치 한 단을 샀다. 앓고 있는 아이와 남편에게 달게 끓인 뭇국 한 그릇씩 놓아주리라. 봄이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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