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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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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5. 2024

난 잘 살고 있어

주소를 알지 못하여 이곳에 씁니다

  회의 장소는 혜화동 '예술가의 집'이라고 했다.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맞다고 했다. 그곳이라면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거기 간 게, 아니 그 붉은 벽돌 건물 앞에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혜화동에서 ㅇㅇ를 만날 때면 자연스레 마로니에 공원 제일 안쪽 나무에 둘러싸인, 예술가의 집 맞은편에 놓인 벤치가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였으니까 말이다.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있던 화단과 건물을 둘러싼 나무들, 무엇보다 공원 제일 안쪽이라 조용하니 쉬기 좋았던 장소였으니까. ㅇㅇ이 항암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길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최근에는 더 자주 앉아있던 그 벤치에 이제는 나 혼자 앉아있겠구나 생각했다. 너 없이 거기 혼자 앉으면 나는 다른 사람일까?



  그날 전철 안에는 책 읽는 이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내가 선 바로 앞에 나란히 앉은 세 명의 여자 모두 글을 읽고 있었다. 둘은 종이책을, 가운데 앉은 여자는 전자책을 보고 있었다.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전철이 정거장에 서고 출발할 때마다 살짝 흔들리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 책 읽는 사람들이 보이는 걸' 했다. 맥락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해놓고는 그게 우스워서 또 웃고. 앓던 끝에 조금 헐거워진 느낌을 아시는지. 그때 내 기분이 꼭 그랬다. 내 가방 속에는 메리 루폴의 산문집이 들어있었지만 그건 아껴둬야 했으므로 나는 전철 안에서 춤을 추듯 가볍게 흔들리며 몇 정거장을 갔다. 전자책을 읽던 여자가 내렸다. 나는 책을 읽고 있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의 전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자들이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 책을 읽고 있는 그들을 방해할 수 없으므로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내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왼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걸 보게 되었다. 하얀 슈트, 치켜 자른 머리, 댕글거리는 이어링, 마른 손가락에 마스크를 쓴 옆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실수를 할까 싶어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누굴까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몇 정거장을 갔을까. 여자가 일어섰다. 그리고 뒷모습.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리고 여자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차림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은 영락없는 ㅇㅇ였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 나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이름을 부르면 어? 하면서 뒤로 돌아서서는 잠시 후 나를 안아줄 것 같았다. 문이 닫히고 여자는 운동화를 신은 발로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졌다. 어쩌면 걸음걸이 마저 그렇게 닮았을까? 그렇다. ㅇㅇ일리가 없었다. 너는 죽었으니까, 내가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테니까, 장례식장에서 네 앞에 흰 국화를 내려놓은 게 꿈이 아니니까.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전철역 밖은 눈이 부셨다. 주말을 앞두고 축제 준비가 한창인 공원은 붐볐다. 하얀 천막이 여럿 들어서고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소풍을 나왔는지 학생들도 많았다. 병원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학림다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둑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가 올 때마다 항상 한적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소곤거렸는데 말이야. 기다리려면 계단에 서 있으라고 하더라. 한 일 분이나 서있었을까. 나는 계단을 그대로 내려와 바로 앞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맞아. 혼자 학림에 간다는 건 말로 안 되는 얘기야. 수술 후에 만났을 때 했던 너의 말.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어. 학림은 조금 더 회복한 후에 가자' 그래서 우리가 간 곳이 예술가의 집 앞에 있던 벤치였잖아. 여름 햇볕이 강했는데도 우리 둘 누구도 자리를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지. 산책을 다녀오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뛸 수 없어서 그 비를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해 준 것도 그 벤치에서였어. 예술가의 집 근처는 여전히 조용하고 봄꽃이 한창인 화단에는 벌이 붕붕거렸다. 이곳에서 메리 루폴을 읽겠다고?



  '물망초랑 무스카리 사이에 채송화들이 빽빽하게 나왔는데 그럼 그것들도 다 뽑아야 하는 거야?' 남편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호박이랑 오이 모종을 옮길 곳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중에 나온 말이었다. 지금이야 물망초와 무스카리 사이에 빈자리가 보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물망초로 가득 찰 거라고, 그곳에 다른 뭔가를 심는 건 안될 거라는 내게 남편이 던진 말이었다. 채송화! 그래, 채송화가 있었지. 네가 씨앗을 받아달라고 했잖아. 엄마의 마당에 뿌린다고. 채송화 새싹이 나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떠나버렸지만 말이야.


마당의 민트를 차로 마셔보았다


  마당은 지금 봄이 난만해. 맑은 날이면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리고 말아. 나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채 작약이나 매발톱 뒤에 숨어서 잔풀을 뽑거나 시든 꽃송이를 따곤 해. 명이 장아찌를 담그고 곰취랑 부추는 벌써 여러 번 잘랐지. 블루베리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어. 비가 온다고 할 때마다 비설거지를 핑계로 꽃을 자른다. 상추와 대파가 보채는 아이처럼 고개를 내밀고 거둬 달라고 성화다. 모르는 척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뭇잎 한 장이 햇볕을 받아 빛나는 채로 바람결에 떨리는 풍경에 - 몇 백 번도 더 보았지만 처음 본 것처럼 - 놀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누구에게나 죽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원하던 대로 살고 있느냐고 물어봐 준 친구가 있는 건 아니지.


난 잘 살고 있어.

너도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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