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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 정문선 May 01. 2021

[일상 관찰] 경험과 사색으로 생각 스위치를 켭니다.

습관 만들기, 노화와 죽음에 대해

습관 만들기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눈이 떠집니다. 한껏 여유로운 토요일, 잠으로 보내는 시간이 아쉽습니다. 누워서 발 뒤꿈치를 붙인 채로 발끝을 부딪힙니다. 처음은 쉬지 않고 100개힘들었는데 조금씩 개수를 늘려 300개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눈에 좋은 운동이라 지인이 추천해준 이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정작 아침깨우는  도움이 됩니다. 혈액순환, 골반과 척추교정, 노안 개선, 불면증 예방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일석다조입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작은 성취로 하루를 시작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제 경험상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습관 만드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무엇을 하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뇌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특성이 있기에 익숙한 방식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습관 만들기는 마치 사이렌이 울리는 비상 상황처럼 뇌가 인식하기에 저항 관성력이 생겨 그만큼 힘들다고 합니다. 많은 책에서 "뇌가 느끼지 못할 만큼 처음은 가볍게 준비 운동처럼 접근하라"라고 조언합니다. 팔 굽혀 펴기 1번, 독서 목차 읽기, 옷 입고 밖에 나가기, 일어나 물 한잔 마시기...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것,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작은 성취가 하나둘 모이면 어느 순간 임계점이 넘어 자연스럽게 한 계단씩 올라가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습관은 작게 시작하며,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접근하는 전략이 주효합니다.


노화현상에 대하여


 40대 초반부터 눈이 점점 침침해지더니 야간에 운전하는 것이 부담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오는 퇴행적 변화인 노안이지만 특히 책을 읽을 때, 조명이 어둡거나 작은 글자를 볼 때 힘이 듭니다. 50을 넘는 선배들이 눈 아파서 책을 못 보고, 글을 볼 때 손으로 안경을 올리며 눈을 가까이 대는 이유가 이해되었습니다. 내가 체득할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실제적인 공감으로 발전됩니다. 40대 중반부터 부쩍 건강에 관심을 갖습니다. 건강은 실제로 타고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운동은 섭생을 이기지 못하고, 섭생은 타고난 체질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체질과 허약한 곳을 알고 잘 관리하는 것이 노후 준비를 대비하는 일일 겁니다. 좋은 음식,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숙면,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책을 읽으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매일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머리로 아는 것보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체의 각 부위는 많이 사용할수록 그에 따른 대가를 청구합니다. 요즘은 눈, 무릎, 허리 등에서 청구서를 보냅니다. 노화현상은 인정하되 어떻게  대응하며 관리하는가는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죽음의 의미


 릴케는 "우리는 각자 안에 커다란 죽음을 지니고 있다. 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었다"라고 말했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습니다. 유명인, 가족과 친지, 주변 지인의 죽음 앞에 잠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뿐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 덤으로 삶을 산다며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조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감동은 있지만 죽음의 목전에서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각자  삶에 의미를 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책을 써내려 갈 뿐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 고통, 허망함, 상실감, 덧없음, 소멸 등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는다 하더라도 누구도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무작정 죽음이란 단어를 밀어내기보다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가끔씩 되내어야 할 것입니다.


 1849년 영하 50도를 기록하는 시베리아 겨울, 스물여덟 살의 한 젊은이는 반체제 혐의로 검거돼 형장에 섰습니다. 형이 집행되기 전 젊은이에게 최후의 5분이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숨은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 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 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 <백치>에 나온 내용입니다. 누군가에게는 5분이 생을 정리할 시간으로 누군가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기도 합니다. 길어야 평균 80세를 살면서도 마치 무한정 살 수 있는 것처럼 현재를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죽음의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여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매일 뜨고 지는 해를 통해서도 삶과 죽음을 떠올릴 수 있으며, 꽃이 피고 짊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지혜롭게 대면할수록 현재의 삶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라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사색하며 현재에 의미를 두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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