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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묵상] 알고, 느끼고, 행동이 조화로운 삶

내가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

by 모티

책을 읽을수록 가슴 한편에서 커지는 목소리가 있다. 책은 그렇게 읽는데 삶은 생각대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외침이다. 아는 것과 삶이 분리될수록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그것이 쌓이다 보면 가족으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책에서 나와 현실로 들어오라"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는 삶이라는 웅덩이를 반복적으로 흙탕물로 뒤섞이게 만든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은혜로 된다'는 말이다. 유한이 무한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의 영역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는 사람에게는 선물이지만, 베푸는 입장에서 보면 희생이다. 천지를 만드시고 통치하시며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셨던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예수에 관한 책이며 신약은 오신 예수에 관한 책인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의 영역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장차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나타나는 실재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셨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삶과 연결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확장해 나가면 사는 것이 곧 예배가 된다.


그럼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 한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며 향기를 전하는 삶이다. 목사님이신 장인어른께서 자주 말씀하셨다. "빛의 밝기가 다른 것처럼 믿음의 분량만큼 살도록 되어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으면 부모를 생각하라"라고 하셨다.

물론 알고 느낀다고 그만큼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뜨뜻미지근하게 교회를 다시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년 이상을 신앙생활하면서 아는 것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며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다는 고백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품을 늘 떠나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 내 중심으로 살면서 배가 고프면 보채는 갓난아이처럼 하나님께서 주는 선물만을 바라고 살았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매를 맞고서야 매가 얼마나 아픈지 알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신앙의 상태도 결국 어린아이와 같이 떼만 쓰는지, 부모님의 안부를 살피며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애쓰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는가 차이였다.


지금도 무늬만 교인은 아닌지 돌아볼 때가 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찰하며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인격의 조화로움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도움을 바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임마누엘' 사상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다. 이성을 초월한 그 무엇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다. 설명이 아니라 삶으로 반사되는 모습이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분리될 때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된다. 종교가 세속에 가까울수록 사회의 양심과 정화기능을 상실하고 물질과 각종 욕망들을 숭상하게 된다.

종교적 이상과 현실이 너무 멀게 느껴져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성경 필사다.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필사한 지 1년이 넘었다. 하루에 10~30분 정도 걸리는 시간이다. 시편, 잠언, 욥기, 요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등 하루에 한 장씩 필사를 하며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날은 밀린 숙제처럼 쓰고 어떤 날은 기도로 연결되었다.


노트에 옮겨 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작은 의식이 되었지만 쓰는 날과 쓰지 않는 날은 하루를 보내는 자세부터가 달라진다. 가벼운 들뜸과 불안들이 사라지고 평온해진다. 마치 비 온 뒤 개울의 흙탕물이 조금 지나 맑아지는 것처럼 마음이 청정해지는 시간이다.

무엇인가 사랑한다면 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수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루를 돌아보면 내 욕심껏 살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필사를 하면서 마음에 닻을 내리는 문장을 만난다. 그런 문장은 형광펜으로 표시하여 지인들과 나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는 문자메시지에 안부와 함께 보낸다. 성경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될 수도 있음을 믿는 마음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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